조국의 땅을 한 번도 밟아본 적은 없지만 한민족의 핏줄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전 세계에 살고 있다. 영화 '헤로니모'는 쿠바에 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다. 머나먼 쿠바의 에네겐 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면서도 이웃 한인들과 매 끼니 쌀 한 숟가락씩을 모아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던 독립운동가 임천택, 쿠바한인 최초로 대학에 진학했고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의 주역이 된 아들 임은조(헤로니모 임), 그리고 쿠바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를 만든 감독도 교포 2세다. 본업이 코트라(KOTRA) 뉴욕 변호사인 전후석 감독은 쿠바 여행 중 한인 4세 택시기사와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이들 부자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서 그 감동적인 경험을 전하고자 크라우드펀딩으로 제작자금을 마련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1905년 멕시코와 국교도 없던 시절 일본의 인력송출회사의 이민 광고에 속아 지상낙원을 꿈꾸며 인천 제물포항을 떠난 1,033명의 조선인들이 마주한 건 멕시코 에네켄(선인장) 농장의 노예 같은 생활이었다. 그리고 4년의 계약기간이 끝났을 때 한일합병으로 돌아갈 조국을 잃어버린 이들은 주권을 빼앗긴 조선으로 돌아가 일본의 노예로 사느니 조국의 독립을 도우며 사는 길을 선택하여 쿠바로 재 이주하게 된다. 고국을 떠나 타지에 정착할 수밖에 없지만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고 사는 디아스포라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이 에네켄 농장에서의 지독한 생활로 삶의 터전을 마련하면서 임천택의 주도로 1938년부터 8년간 임시정부로 보낸 독립운동자금은 모두 1,489원 70전이라고 '백범일지'에도 기록되어 있다. 2살 때 고국을 떠나왔음에도 자식에게 조국을 잊지 말라 가르치면서 쿠바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던 임천택은 끝내 살아서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했지만 아들 헤로니모의 노력으로 1997년 적성국가 출신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고 현충원에 안장됐다.

쿠바 한인 최초로 대학에 진학한 헤로니모는 아바나 법대 동기로 만난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에 참여하게 된다. 1959년 쿠바혁명의 성공 이후 혁명정부 관료로서 산업부 차관을 역임하며 당시 산업부 장관이었던 체 게바라와 함께 일하며 9개의 훈장을 수여받는 등 쿠바 한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쿠바혁명에 따른 국교 단절로 이들의 삶은 잊혀 있었으나 1995년 광복 50돌 세계한민족축전에 쿠바한인 대표로 헤로니모 임이 참가함으로써 알려졌다. 이후 쿠바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등 많은 노력이 있었으나 쿠바정부는 한인회를 인정하지 않았고 북한 대사관에서 헤로니모는 홀대를 받았다고.

감독이 모 인터뷰에서 "세계 역사를 보면 다문화와 여러 정체성이 충돌하는 곳에서 부대끼며 자란 사람들이 현재를 초월할 수 있는 혁신을 제공한다"고 말하고 있듯이 영화에서는 경계에 있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는 이념과 경계의 벽을 허무는 휴머니즘을 통해 남과 북 통일의 마당을 열어갈 수 있는 있는 존재로서 재외한인의 역할과 가능성을 보게 된다.

이미 상영 종료된 '헤로니모'가 25일 오후 3시 30분 독립영화관에서 특별상영된다고 한다. 지난달 개봉했으나 미국 상업영화의 대표 디즈니의 '겨울왕국2' 때문에 며칠 만에 상영이 종료됐던 안타까움이 이번 기회에 해소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