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뒤 1948년부터 다음해까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활동했다.

일제 부역자들을 색출,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는 초기 친일파를 무더기로 색출했지만 다음해 이승만정권의 심한 견제에 막혀 사실상 제기능을 상실한다. 이어 반민족행위처벌법도 폐지되면서 반민특위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만다. 광복 직후 국민들의 눈치만 보던 친일파들은 반민특위와 관련법이 폐지되자 다시 한국사회 주류로 등장한다.

나아가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자 이념 대립을 조장해 민족주의 인사들을 빨갱이로 매도해 억압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부와 권력을 독차지했다. 이런 그릇된 정치·사회적 토양은 독재자들에게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실제로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독재자들이 즐비하게 등장했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이런 독재자들을 지금껏 단 한번도 단죄하질 못했다. 5·18만 보더라도 그렇다. 무려 40년이 지나도록 책임자조차 제대로 가려내지 못하고 있다. 올해 광주에서 39년 만에 열린 전두환의 재판에서도 이런 무기력함은 그대로 드러났다.

고 조비오 신부에게 '가면을 쓴 사탄''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주장한 전두환을 법정에 세우긴 했으나 그 뻔뻔함만 확인했을 뿐이다. 당시 재판에서 전씨는 검찰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전두환의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5·18 행방불명자로 의심되는 유골 40여구가 발견돼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다. 법무부는 이들 신원미상 유골에 대한 정밀감식을 시작했지만 행불자 여부를 파악하는데 최소 6개월 이상 소요된다고 한다.

이제 곧 새해가 밝아온다. 2020년은 5·18 40주년이다. 국립 5·18묘역에 수많은 희생자들이 누워있고 행불자들은 아직껏 행방조차 찾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는 40년이 지나는 동안 제대로 된 진상규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학살의 원흉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숨어서 12·12군사쿠데타 발발일에 호화판 식사를 하고, 지만원 등 일부 인사들은 5·18을 조롱하기도 한다. 언론을 통해 이런 행태가 국민들에게 알려져도 이들은 부끄러움과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

다행인 것은 올해를 며칠 남겨주지 않은 지난 27일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진상조사위)가 27일 공식 출범했다는 점이다.

진상조사위는 특별법에 따라 위원회 구성을 마친 후 최대 3년 진상규명 활동을 수행하며, 위원회는 사무처 직원을 포함해 52명의 인원으로 구성된다. 진상조사위는 사무처 구성을 위해 정부 부처에서 파견되는 15명을 제외한 34명의 별정직 공무원을 신규 채용할 예정이다.

다만 진상조사위는 직원 채용을 완료하는 대로 조사활동을 개시해 본격적인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조사활동에 나선다는 방침이지만, 실제 조사관 채용 일정 등 인적 구성을 마무리하는 시점을 고려하면 내년 초에나 공식 활동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진상조사위의 진상규명 대상은 1980년 5월 당시 공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 군 비밀조직의 역사 왜곡·조작, 최초 집단발포 경위·책임자, 계엄군 헬기사격 명령자·경위, 집단 학살, 민간인 사망·상해·실종, 암매장 사건 등이다.

무려 40년 만이다. 대체 무엇이 5·18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가로막았단 말인가. 진상조사위의 앞으로 활동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은 지대하다. 과연 누가 발포명령을 내렸는지, 그동안 말로만 떠돌았던 헬기사격과 성폭행이 정말 자행됐는지 명확하게 밝혀지길 기대한다.

나아가 상부의 명령이라고 하지만 그토록 잔인한 일을 저지르고도 우리의 이웃으로 숨어서 살아가는 가해 군인들도 모두 찾아내 처벌할 수 있기를 바란다. 친일부역자를 단죄하지 못해 우리 현대사가 굴절됐던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