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말하기에 관련한 과목을 학교에서 꽤 오랜 세월 가르쳐왔다. 이론 뒤에 따르는 그 응용 프로그램의 하나로 조선 후기 궁중 도화서 화원이었던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들을 감상하고 인상에 남는 작품을 골라 여러 유형의 글을 써보는 시간을 즐겨 한다.

두 사람은 분명 같은 시기 같은 사회상황 속에서 활동한 화가들임에도 불구하고 심상의 표현 의도나 색감, 화풍 등에서 무척 다른 독특한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 특히 신윤복의 풍속화는 많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만큼 은밀하고 신선한 서사들을 가득 안고 있어서 관심 있게 들여다보곤 한다. 그 중에서도 ‘기다림’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컴퓨터 바탕화면에 둘만큼 좋아하는 그림이다.

화사한 봄날의 어느 대가(大家) 뒤뜰쯤일까. 한 여인이 풍성한 치마 위에 흰색 앞치마를 정갈하게 두르고 담벼락에 기대어 시간이 멈춘 듯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살짝 들려있는 왼쪽 발과 길 쪽으로 향한 시선에 긴장과 초조함이 역력하지만, 어쩌지 못하는 그리움과 설렘 또한 온 자태에 가득하다. 뒷짐을 지고 있는 손에는 송낙 하나를 말아 쥐고 있는데 그 송낙에 담긴 이야기만큼이나 흐드러진 버드나무 풍경은 보는 이의 마음속에까지도 봄바람이 일렁이게 한다. 작품의 시점과 내용이 전혀 다름에도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만났던 유주현의 ‘탈고 안 될 전설’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선 듯 가슴 밑바닥이 아릿해 온다.

어떤 사연이었을까. 상상의 나래가 여인의 과거만을 넘나드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의 실체가 현실에서 잡히는 순간 새로운 서사가 펼쳐질 것 같은 기대감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렇듯 ‘기다림’은 지루하고 초조하게 멈춰 서있는 시간만은 아니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꾸는 꿈이고 희망이다. 만남과 시작으로 통하는 디딤돌이며 꼭 건너야 할 다리이다. 생의 대부분을 사색과 독서로 일관한 신영복 교수 역시 그의 저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기다림은 더 많은 것을 견디게 하고, 더 먼 것을 보게 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눈을 갖게 하며 자기 자리를 굳건히 지키게 해주는 단단한 마음’이라고 했다.

사계절 중 죽음의 시간으로 표현하곤 하는 겨울을 견뎌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기다림의 시간이다. 봄이 더욱 찬란한 것 역시 기다림의 시간인 겨울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선인들의 문집에 담겨있는 시(詩)들을 살펴보면 유난히 봄을 노래한 작품들이 다른 계절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 영남의 통유(通儒)’라고 불리는 퇴계 이황과 맞물려 호남의 ‘통유’로 지칭되는 고봉 기대승 선생의 작품들도 의아스러울 정도로 봄에 집중되어 있는데 매화에 관한 시들이 특히 많이 보인다. 여러 문인들뿐만 아니라 화가들의 화집에서도 그런 현상은 흔히 나타난다.

유학자, 즉 성리학자들의 학문적 과제는 세상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그 순리에 충실히 따르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토록 봄을 찬양하며 노래하는 이유 역시 봄은 인고의 기다림으로 겨울을 견뎌내며 피어올린 희망과 꿈의 결정체이며, 매화는 그 성정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대표적인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유학의 근간이라고 볼 수 있는 인(仁)이 사단(四端, 仁義禮智)의 단서가 되듯 만물을 낳는 봄은 사계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관류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봄은 여름의 성장도, 가을의 결실도, 또 다른 새봄을 잉태하고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는 겨울도 온 몸으로 머금고 있다.

온 세상이 죽어있는 듯이 고요하고 쓸쓸한 깊은 겨울 속에 있다. 이 겨울이 아무리 혹독하고 추워도 기다림이 있는 한 눈부신 매화꽃을 앞세우고 봄은 반드시 찾아온다. 빛이 없는 동굴 안에서도 밝고 따뜻한 희망을 꿈꾸며 겨울을 이겨내고 있는 동물들처럼 겸손하고 간절한 염원으로 새봄을 기다리리라.

해마다 겨울로 들어서면서, 또는 그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면서 어김없이 되뇌는 마음속의 언어가 있다.

‘……그리고 겨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