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 문턱 넘어 경칩 지나니 바람결이 살갑다. 아지랑이 홀로 옹알대고 이팝나무 우듬지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우련하더니, 가지마다 움이 발돋움하여 파란 싹으로 돌아오는구나. 그새 홍매는 성급하게 몸을 풀더니 꽃망울을 툭 터트린다.

구례 하동을 끼고 섬진강 물길 따라 흐르다 소읍에 이른다. 그를 찾아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선다. 영정이 보이질 않는다. 우두커니 서 있던 그의 아내가 대신 말없이 맞이한다. 그의 얼굴이 아직은 필요한데, 묵례로 예를 대신한다. 할끔한 얼굴, 검은 옷에 떼꾼한 눈, 굳게 다문 입, 귀밑으로 흘러내린 몇 올 살쩍, 힘을 잔뜩 준 턱 때문에 그녀는 더 강파르게 보인다. 울음이라도 쏟아놓으면 더 나으련만, 입술을 앙다물고 나목처럼 굳어 있다. 가슴속엔 어떤 사념의 강이 켜켜이 흐르고 있는 걸까.

누구든 천국을 소망하지만, 누구도 천국으로 가는 그 길을 바라진 않는다. 죽음을 소망하는 자는 드물지만 죽음을 겁내는 자도 비참하다. 아직은 갈 때가 아닌데, 그는 단 불에 나비 죽듯 그예 육신을 벗고 말았다. 노년은 저편을 향해 사라지지만 중년에겐 저승에서 누군가 찾아오는 모양이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뜻밖에 나른한 기운이 묻어난다. 군데군데 문상객들이 둘러앉아 담소하며 소소한 일상을 풀어내고 있다. 그는 저세상이 아니라 잠시 봄나들이라도 간 게 아닐까, 하는 생뚱맞은 느낌조차 든다. 영정이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시방 봄이 중얼대며 몰려오고 있어서일까.

입구 쪽에서 한 사내가 영정을 안고 잰걸음으로 들어선다. 들큼한 봄바람 한 자락 그 뒤를 따른다. 황망 중에 사진 마련이 쉽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비로소 영정이 제자리에 놓이자 가벼움이 걷히고 상갓집 모양새가 잡힌다. 문상객들은 영정을 보자 기다리는 사람이 왔다는 듯이 서로 술잔을 권하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젠 영정 속의 그가 문상객들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뜻밖에 그의 표정이 넉넉하다. 영정 안은 적요하지만 그의 얼굴은 외려 평화롭다. 이승에서의 소멸은 어둠이 아니라 새로운 빛이 될 수도 있구나. 태어남은 죽음과 함께 시작하고 죽음은 결국 삶을 데리고 저편으로 사라진다. 영정의 안과 밖은 단지 형태가 다를 뿐이다. 남편의 늡늡한 얼굴을 아내는 묵연히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침묵 너머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목전에 다다르지 않는 한 죽음은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두려운 것은 소멸 그 자체보다도 어둠에 둘러싸인 여러 상황이겠지. 메말라가는 육신, 살 떨리는 고통, 다시는 보지 못할 살붙이들, 불투명한 사후 세계, 검정 일색의 주변 풍경들이 죽음을 더 무겁게 만든다. 아니 두려운 것은 그 죽음보다 그 너머에 있는지도 모른다. 소를 치는 이가 채찍으로 소를 몰아 외양간으로 가는 것처럼, 소멸에 대한 공포는 생명을 쉼 없이 어두운 구석으로 몰고 간다. 누구든 소멸 앞에선 평등하다. 얽혀 살다가 때가 되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본향으로 되돌아가는 게 섭리다. 그래야 한다면 산 이와 죽은 자 중 누구를 위해 울어야 할까. 죽음은 삶의 이전이지만, 그는 또 다른 넉넉한 평화로 다시 돌아와 있지 않은가. 하나 그의 아내는 당장은 대리석과 진흙으로 빚어진 생과 맞닥뜨려야 하리라.

어쩌면 장례는 고단한 생을 정화하는 숭고한 의식인지도 모른다. 누구든 언제 저편으로 발목을 디딜지 아무도 모른다. 그땐 어디로 도망치려 한들 도리가 없다. 과실이 가운덴 씨를 담고 있듯이 생의 복판엔 소멸이 똬리를 틀고 있다. 생과 사는 한 몸 안에 얽히고설켜 있는 것, 하여 살다가 가는 것은 생명 본연의 질서다. 그 씨를 다독이며 살다 보면 더 친해질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밖으로 나서니 방창하다. 봄맞이하기에 딱 좋은 날씨다. 잉잉대며 밀려오는 저 문문한 울림, 자드락길 휘휘 돌아 강을 건너오는 봄의 소리다. 그래, 저편 무량한 것들이 되살아 중얼거리며 돌아오는 발걸음 소리이것다. 오고 가는 생멸生滅,, 여여如如하여라. 그의 푸른 이마를 추억하며, 봄 속을 휘적휘적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