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어디쯤 ‘원수 같은 놈’ 하나 있게 마련이다. 그럴 리야, 하고 여긴다면 그는 애덕愛德이 높든지 아니면 애증愛憎의 질곡이 옅거나 건너뛰어 살아왔든지 그중 하나이리라. 애증은 한 마음자리에서 움트는 것, 사랑하다가 미움으로 얼크러지고 증오하다가 화해로 가는 징검다리가 생의 질박한 길목이 아니던가. 살다 보면 그놈이 사라져 버렸으면, 하고 독한 저주를 퍼붓는 때가 어찌 없으랴. 다만 그 심중을 다스리며 발뒤꿈치로 누르고 살 뿐이지.

영화의 한 장면이다. 사랑하던 여인에게 배신당한 어떤 이가 오랫동안 벼려왔던 복수의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한데 그는 몇 날 며칠을 고심한 끝에 그 절호의 기회를 미루고야 만다. 애증의 길항 끝에 내린 회다짐이었겠지. 그 까닭을 묻자, ‘복수가 끝나면 더는 살 이유가 없을 것 같아서’라고 말한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움이 정점을 이루었을 때 삶은 또 다른 변곡점을 맞이하는 모양이다. 흔히 ‘이젠 다 지나간 일, 잊고 사는 게 좋을 거야’ 하고 말하는 것은 당사자에겐 낡은 충고일 뿐이다.

억지로 한다고 한들 용서가 제대로 되는 일이던가. 용서란 가슴 깊이 다독여 재우고 오랫동안 삭여야 가능한 일이다. 사랑으로 시작했다면 그 끝은 마침내 화해로 돌아가게 된다. 피해를 본 사람에게 용서를 권유하거나 강요하지 말 일이다. 용서를 미루면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느니, 용서는 외려 자신을 더 이롭게 한다는 둥, 그럴싸하게 포장한 충고의 말은 그의 등을 성마르게 떠미는 것밖에 안 된다.

기다리다 보면 어느 땐가는 용서의 기회가 찾아오게 마련이다. 화살에 맞은 사람은 화살을 꺼낼 때 조심스럽게 빼내야 한다. 그러려면 성급해서는 안 되고 상처를 갈라서는 더더욱 안 되리라. 견디며 천천히 때를 기다려야 한다. 자칫하면 화살을 빼낼 때 피 묻은 살점까지 뒤 딸려 나올 수도 있을 데니까.

아홉 살 적 기억이다. 세 마장 밖에 사는 고모님 집에 한나절을 걸어 심부름을 간 적이 있었다. 체수 작은 고모님은 늘 혼자였다. 당시 고모부는 삿된 여인과 눈이 맞아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고모님은 먼 길을 걸어온 어린 조카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그날 깊은 밤, 조카는 무슨 소리엔가 잠이 깨고 말았다. 옆자리에 있어야 할 고모님은 보이지 않았다. 고모님은 툇마루에 혼자 앉아 열푸른 달빛에 젖은 마당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마당가에선 툭 툭 감꽃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잠결에 조카의 귀에 어렴풋이 떨어지는 감꽃 소리를, 고모님은 밤새 내내 멍든 가슴으로 받아들였으리라.

그동안 고모부는 고모님을 버려둔 채 근동에서 새 여인과 아예 살림을 차렸다. 고모님은 남편이 돌아오기를 증오하면서도 속절없이 기다리고 기다렸다. 오랜 세월이 흘렀던가. 결국 고모부는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죽을병이 들어서였다. 새 여인은 병든 고모부를 버려둔 채 자신이 낳은 자식을 데리고 밤 봇짐을 싸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고모님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갈 데 없는 병든 남편을 끌고 와 마지막 병시중을 들었다. 고모님 곁에서 병세가 조금 누꿈해지는 듯하더니, 고모부는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그예 눈을 감고 말았다.

발인 날, 그동안 맷돌로 눌러두었던 고모님의 한은 솟구치고야 말았다. 그제야 봇물 터지듯 설움이 낭자하게 쏟아졌던 것일까. 고모님의 통절한 울음을 두고 주변에선 말들이 많았다. 더러는 잉걸 같은 애증이 터진 것이라고도 했다. 하나 그런 것만은 아닐 듯싶었다. 무언가가 고모님의 은결든 삶을 흔들어 놓고 말았겠지. 어쩌면 미움의 대상이 사라진 후 사무친 허망함이었거나, 아니면 긴 기다림 끝에 찾아온 저릿한 화해였는지도 모른다.

미움도 사랑도 한 뿌리에서 움이 돋고 싹이 트는 것, 미움이 생기더라도 사랑이 밀려오더라도 증오하거나 매달리지 않으리. 애써 용서하려 하거나 서둘러 떨쳐내려 하지 않아도 시절이 익으면 제풀에 풀어지고 끊어질 날이 있으리라. 설령 살아생전 매듭이 풀리지 않을지라도, 차안此岸의 강을 건너면 궁극엔 화해로 남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