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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기
탁현수(수필가·문학박사)

2020. 06.17. 09:01:39

탁현수

활자로 된 것이면 무엇이든 쉽게 버리지 못하는 습관 때문에 서재가 뒤죽박죽이다. 대부분 한 번 보고 폐기하는 가벼운 잡지들까지도 다시 봐야 할 것만 같아 쌓아 두곤 한다. 문화나 문학, 교육 잡지는 물론이고 음악, 무용, 심지어 여행, 낚시, 자동차 관련 잡지들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손수 모아왔으니 오래된 것이 기껏 40여년을 넘나들겠지만 그것들을 뒤적이다 보면 과거로의 타임머신을 탄 듯한 착각에 빠져들곤 한다. 민감할 만큼 그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 잡지의 특성인지라 비교적 정확한 세월 돌아보기가 되는 셈이다.

오늘도 잠깐 ‘사회발전연구소’에서 83년도에 발행한 ‘한국인’이란 잡지를 펼쳐들었다. 첫 장을 넘기자 그 무렵 주목받는 관심거리였는지 당시 유명 가전회사의 컴퓨터 광고가 가득 실려 있다. 장난감 같은 작은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가족이 둘러서서 환하게 웃고 있다. 가족 모두가 함께 사용할 수 있다는 요란한 설명과 함께 ROM이 28KB, RAM이 16KB라고 적혀있는 규격 표시를 보자니 웃음이 나왔다. 다른 페이지에는 국내 유일한 대형 냉장고라고 자랑하는 것의 용량이 200L이고, 혁신적으로 모든 기능을 자동화 시켰다는 칼라 TV의 화면 크기는 14인치였다. 물질문명이 참으로 빠른 달리기를 해버렸음을 실감하게 했다.

그 시절에 비해 너덧 배나 큰 가전제품들을, 그 것도 한 집에 몇 대씩이나 척척 들여놓고 살고 있고, ‘슈퍼’라는 명칭까지 단 상상을 초월하는 컴퓨터는 물론이고, 그에 못지않은 스마트폰까지 온 국민의 손에 들려있는 편리한 세상인데 왜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삶은 각박해져만 가는 것일까.

한 가지, 그 때나 지금이나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은 사회악을 근절시켜 평화롭게 살아가고자하는 염원이었다. 각계 저명인사들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라는 주제로 꾸민 특집에서는 교육 현장의 붕괴, 성범죄, 삭막해져 가는 도시와 농촌, 호화 혼수, 공직 사회에 흐르는 탁류 등이 사회를 좀먹는 문제점이라고 요소요소에 지적하고 있다. 큰 주제들로만 보면 요즈음 잡지를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회 파멸현상까지 걱정할 정도로 급박하다고 생각한 현 사회의 문제점들이 오늘의 일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같은 고민을 했다는 점에 조금은 안도감이 느껴졌다.

과거로 돌아가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다 보니 문득, 시골 농장에서 순한 눈망울로 되새김질을 하고 앉아 있던 황소들이 떠올랐다. 평소와는 다르게 유독 고요하고 유순한 모습으로 되새김질을 하는 짐승들을 볼 때마다, 어떤 일을 되풀이하여 음미하고 생각한다는 뜻인 ‘반추(反芻)’의 어원이 소나 염소가 한 번 삼킨 먹이를 게워내어 되새기는 ‘반추위(反芻胃)’에서 나왔다는 말에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진다. 시간에 쫓겨서, 배가 고파서, 먹이가 탐이 나서, 몰래 살짝 먹느라 우걱우걱 해치웠던 것들에 대한 반성과 회한의 시간 되새김질! 그런 시간들이 어디 동물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겠는가. 욕망을 향해 앞으로 내달릴 때는 공격과 경쟁이 따르지만, 반추의 시간 안에는 포용과 용서가 함께한다. 세월 돌아보기는 그만큼 정화와 화해의 시간이며, 지난날과 오늘의 조율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학창 시절, 할머니께서는 달포에 한 번쯤 자취 살림을 살펴주러 오시곤 했다. 오실 때마다 이삼 일쯤 머물다 가셨는데 아침 등교시간이면 꼭 학교까지 바래다주셨다. 교문에 다다르면 책가방을 내 손에 쥐어주고는 어서 들어가라며 손을 치셨다. 교실까지 가는 길…. 몇 번이고 돌아보아도 할머니는 그렇게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오로지 내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으로 서 계시던 할머니.

살아오면서 자존감에 혼란이 올 정도로 힘겨울 때마다 부적처럼 꺼내보곤 하는 내 인생의 돌아보기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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