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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멍이
김향남(수필가·문학박사)

2020. 07.01. 09:50:55

산길을 걷다가 도마뱀을 만났다.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았다. 윤기가 흐르는 암갈색 등과 아기 손처럼 쫙 펼친 네 발 그리고 살짝 구부린 긴 꼬리가 낯설지 않았다. 반쯤 감은 눈은 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둥근 나무그루터기에 엎드려 낮잠이라도 즐기는 것일까? 고즈넉한 산속, 도마뱀과의 조우는 옛 기억을 불러다 주었다.

초등학교 때, 가을소풍 장소는 언제나 그 산마루였다. 사방이 확 트여 전망도 좋았고 소풍을 즐기기에 그만한 곳도 없었다. 올라갈 때는 힘들어도 멀리까지 조망하는 느낌은 형언키 어려웠다. 특히나 기차가 지나가는 풍경에는 마음까지 설?다. 굽이를 돌아오는 기차는 유유하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기차는 언제나 꿈을 꾸게 하였다. 우리집 마루에서 소리로만 듣던 때나 눈앞에서 훤히 바라보고 있는 때나…. 노상 미련처럼 남아 있는 내 떠돌이 근성은 아마도 그 기차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점심을 먹은 뒤 자유시간, 사라져간 기차 꽁무니를 망연히 쫓고 있을 때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어? 도마뱀이다! 다급하게 터져 나온 그 소리는 나를 향한 것이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야! 향남아. 니 등에 도마뱀이 올라갔다니까.

그제야 상황을 알아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물큰한 느낌. 축축하고 징그러운 그것. 금방이라도 목을 조여올 것 같은 공포감. 지레 겁먹은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 순간 누군가 쉭, 내 등을 후렸다. 나는 또 한 번 놀랐지만 뜻밖의 함성에 적이 안도했다. 우와아, 거멍이가 생명의 은인이다. 도마뱀이 어깨를 넘어가믄 죽는다고 했는디 거멍이가 살려줬잖아….

‘생명의 은인’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유난히 크게 들렸지만 나는 얼떨떨했다. 순식간의 일인 데다 충격 또한 덜 가신 상황이었다. 게다가 하필 ‘거멍이’라니. ‘거멍이’로 말하면 벌레보다, 아니 도마뱀보다 열배 백배는 더 징그러웠다. 얼굴이 거멓다고 ‘거멍이’라 불리던 그는, 누구 골탕 먹이는 일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고무줄놀이 하는 우리에게 슬쩍 다가와 줄을 끊고 달아나는 것도 ‘거멍이’였고, 여자애들 치마를 들춰 ‘아이스께끼’를 남발하는 것도 걔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었다. 그 애가 하는 일은 호시탐탐 누구를 괴롭히는 일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내가 당한 것만 해도 부지기수였다. 며칠 전에도 옆을 지나다 갑자기 가슴팍을 툭 치고 도망갔다. 그 바람에 나는 가슴이 얼얼한 것은 관두고라도 자칫 머리까지 다칠 뻔했다.

저만치서 ‘거멍이’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막대를 까불거리며 봐라, 이걸로 내가 너를 구했다니까! 의기양양 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따라 영 밉상은 아니었다고 해도 그렇다고 얼른 입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때마침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전교생 장기자랑을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모두가 후닥닥 무대 쪽으로 몰려가고 나도 곧 뒤따라갔다. 산마루가 시끌시끌 소풍도 절정을 향했다.

그로부터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시간이 가도 좀처럼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 일도 그중 하나가 되었다. 왜 아니겠나. 하마터면 죽을 뻔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물론 의문은 남아 있다. 만약 도마뱀이 내 어깨를 넘어버렸다면 어찌 됐을까? 정말로 죽었을까? 도마뱀은 어떻게 내 등까지 올라올 수 있었을까? 누군가 장난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범인은? 더 의문스러운 건 ‘도마뱀이 어깨를 넘어가면 죽는다’는 말이다. 언뜻 하나의 명제처럼 들리지만 그게 과연 참인지 거짓인지, 어디서 어떻게 나온 말인지 모르겠는 것이다. 또 하나, 도마뱀이 죽는다는 건지 내가 죽는다는 것인지…. 여전히 진위를 알 수도 없고 확인하기도 어려운 의문투성이의 말이다. 아무리 헤아려봐도 알 수 없는 삶처럼….

분명한 건 있다. 바로 죽는다는 것. 그보다 분명한 사실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보다 겁나는 일은 또 어디 있을까. 그러니, ‘거멍이’가 생명의 은인인 것은 확실하지 싶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 순간의 공포를 어찌했을지, 생각만 해도 아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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