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지역
문화
스포츠
기획
특집
오피니언
장석원의 현대미술 에세이-질문과 대답<14>몸과 전위성
몸은 삶에 대해 질문도 답도 주지 않는다
‘아브젝트’가 말하는 불결함·배설은 욕구의 생리
모순덩어리 인간, 상반된 것들의 혼재 속에 살아
문유미, 몸으로 말 걸며 아슬아슬 전위성 끌고가

2020. 07.09. 11:31:58

2014년 대인시장 고깃간 밑에 자신이 고기가 되어 벌인 현장 포토 퍼포먼스 장면, 문유미의 ‘대인 타타타’.

몸이란 무엇인가. 영혼이 거주하는 집? 아니면 영혼이라는 추상적 존재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생을 영위하는 개체?

몸은 태어나고 살아가는 동안에 양육되고, 먹고 자고 성장하다가 점점 쇄락하여 죽는다. 먹으면 배설하고, 피곤하면 잠이 든다. 인간의 본능은 육체적 욕구와 깊은 관계를 갖는다. 생의 욕구는 살고자 하는 육신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생은 본인의 의지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기도 하다. 생이 타의적인 것이라면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을 지닌다. 인간의 비극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설정된 이 조건, 인간이 간혹 운명이라고 느끼는 이 문제에서 출발한다.

현대인의 욕망을 상품 이미지로 표현한 퍼포먼스, 문유미의 ‘최초의 만찬’. 우리는 상품과 그 이미지를 소비하면서 욕망을 해소한다고 믿는다.
내가 90년대의 뉴욕에서 봤던 아브직 아트(Abject Art)는 몸으로부터 발생하는 더러운 문제들로부터 발생하는 것들이었다. 거기에는 인간의 털과 벌꿀 왁스가 결합된 신체의 단면이 잇었고, 동성애적 사진, 여성의 성기로부터 길게 이어진 탯줄 같은 게 있었다. 한국작가의 비디오에는 욕실에서 벗은 상반신을 끊임없이 때밀이 타월로 문지르며 웅얼거리듯 독백하는 그리고 시멘트 바닥을 청소용 솔로 문지르는 소리가 이어지는 것이었다. 인간의 머리카락, 타액, 피, 정액, 배설물 등이 동성애적 삶을 반증하는 사진과 함께 범벅이 되어 전시된 작품도 있었다.

몸은 정신의 말단이고 그 끝에서 고뇌하는 현대인의 영혼 같은 것이 보였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인간은 고통을 느끼며 위안을 찾는다. 삶은 몸으로 살아지는 것이지만, 몸은 삶에 대해서 질문도 답도 주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이 갖는 또 하나의 비극이다.

2014년 6월 초, 일본의 퍼포먼스 작가가 광주를 방문해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광주비엔날레 인근 카페였는데 그 자리에서 여성 퍼포먼스 작가 문유미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부산의 국제 퍼포먼스 행사에서 온 몸에 머리털을 붙이고 재래시장을 가로질러 걷다가 어물전에서 생선을 파는 행위를 했었다. 전라의 몸에 머리털을 붙이고 맨발로 시장을 가로지르는 도발은 행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몸은 그녀의 도발적 의도를 전파하는 강력한 무기였다.

2010년 문래예술공장에서의 문유미 퍼포먼스 ‘헤어 액션’ 장면. 온 몸에 머리카락을 붙이고 페인팅을 하고 있다.
2011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요셉 보이스 전을 할 때, 미술관 로비 공간에서는 집체적인 퍼포먼스가 있었다. 국내의 원로급 퍼포먼스 작가인 성능경은 ‘누구나 예술가입니까?’ 하고 요셉 보이스와 상반된 질문을 던지며 예의 여행용 가방을 끌고 나타나 거기서 운동 기구 등을 꺼내 일상적인 운동을 하면서 그리고 나중에는 고무총으로 탁구공을 관객에게 쏘면서 줄곧 메시지를 던졌다. 탁구공에 적힌 갖가지 메시지는 우리가 살면서 곰곰이 씹어볼 만한 내용들이다. 그때 문유미가 ‘누가 요셉 보이스냐?’고 소리치며 넓은 로비 공간을 뛰어다니던 기억이 난다. 마치 숨어 있는 요셉 보이스를 찾는 것처럼….

문유미의 가장 도발적인 행위는 그녀가 사진을 이용해 관객에게 보였던 장면이었다. 광주 대인시장을 돌면서 나체로 200호 정도의 전통적 액자 틀을 들고 다니면서 찍은 것이다. 액자 틀과 바깥에 그녀의 벗은 몸과 대인 시장의 풍경이 잡히게 된다.

액자의 안과 밖의 풍경은 무엇이 다를까? 그림이나 사진은 액자에 담기게 되면 액자 바깥의 풍경과 전혀 다른 별 세계를 갖게 된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대형 액자 틀을 끌고 다니면서 질문을 던진다. 액자 안에 혹은 바깥에 걸쳐진 자신의 몸과 통상적인 재래시장의 풍경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벗은 몸이 액자를 동반하기 때문에 예술로 보이느냐는 반문? 그녀의 메시지는 그 질문과 대답이 명쾌하지 않다. 모호하지만 포괄적인 질문과 대답이 가능하도록 열고 있다.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그녀는 아슬아슬한 전위성을 끌고 간다.

‘공포의 권력’을 쓴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대상에 하나의 자아가 있듯이, 하나의 초자아에는 하나의 아브젝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루함이 억압들을 펼쳐보이는 흰색의 식탁보가 아니며, 또한 육체가, 밤이, 그리고 담화들이 뒤틀리는 욕망의 전환 혹은 역전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길들여진 야수적인 고통인데, 주체가 그 고통을 아버지로 바꾸기 때문에 숭고한 동시에 광적이다. 즉 타자의 욕망을 상상하기 때문에 주체는 그 야수적인 고통을 지탱한다.

2010년 문래예술공장에서의 문유미 퍼포먼스 ‘헤어 액션’ 장면. 온 몸에 머리카락을 붙이고 페인팅을 하고 있다.
육체로부터 빚어지는 불결함, 토할 것 같은 그 정체는 아브젝트라는 이름의 초자아라는 것이다. 무엇인지 모를 그것이 내 존재의 축, 문화의 도화선 바로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육체를 두고 주체와 타자성, 그리고 욕망과 고통 사이에서 인간은 번뇌한다.

몸은 단순히 몸이 아니다. 살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움직이는 개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지극히 내면적인 동굴이기도 하다. 인간은 꿈을 꾸기도 하면서 동시에 욕망한다. 인간의 삶은 공장의 제품처럼 일률적일 수가 없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만의 그 세계를 말하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온 몸에 욕구와 관련된 제품 이미지들을 붙이고 쇼핑백까지 들고 관객에게 몸으로 말을 거는 문유미는 현대인의 욕구에 관심이 많다. 사실 백화점의 상품들을 갖고 싶다는 욕구는 일반적이다. 그 일반적 욕구의 통로를 통하여 우리는 공감을 가질 수 있다. 욕구는 몸과 몸을 잇는 통로가 된다. 왜 벗어야 하는가? 왜 갖지 않고서는 만족을 못하는가? 아브젝트가 말하는 불결함과 배설은 욕구의 생리를 잘 말해준다.

유태인이었던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유태인의 가스실에서의 학살을 떠올리며 그와 반대 편에서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 매달린 양말을 언급하는 것은 그와 같은 상반된 것들이 주체 안에 혼재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인간은 모순 덩어리이다. 그것을 긍정하면서 우리는 아브젝트와 그 반대편의 사회적 기제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전위성이란 그 모순을 먹고 사는 각성이다. 번뇌의 꽃, 문화적 도화선이다.

/장석원(미술평론가)


/장석원(미술평론가)

정치

사람들

경제

사회

기사 목록

검색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