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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여보라
정태헌(수필가)

2020. 08.12. 10:29:39

‘치, 아빠만 생각해!’

이 무슨 앵돌아진 소리인가.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습니다. 금남로 지하상가. 발걸음소리와 말소리, 어디선가 흘러나온 노랫소리와 알 수 없는 소리로 북새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말의 출처는 뒤쪽 빵집 앞에 있었습니다. 소녀가 말소리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노란 티셔츠를 입은 앳된 소녀의 손엔 빵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 곁엔 아빠인 듯한 사내가 서 있었고요. 두 사람은 무어라 말을 주고받았지만 더는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빵을 사면서 딸이 목청을 조금 높였던 모양입니다. 아빠가 무슨 말을 했기에 딸이 무람없이 목청을 높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빠의 손엔 포장 상자가, 딸의 손엔 우유 식빵이 들려 있었습니다. 딸이 빵을 사는데 아빠가 말참견을 했던 걸까요. 아니면 빵집에 오기 전부터 무슨 견해차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유로 무슨 말을 했든 상관없습니다. 그 말이 귀에 파고들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요.

부녀는 내 곁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발길을 옮겨 그들 뒤를 따랐습니다. 가는 방향이 같았으니까요. 왜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는지 처음엔 알지를 못했습니다. 몇 걸음 걷다가 불현듯, 어느 수도승의 말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지 뭡니까.

‘복작대는 데서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무슨 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는지를. 무언가가 들리면 그 소리를 붙들고 화두 삼아 곰곰이 묵상해 보라. 뜻밖에 이치나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니까.’

가끔 시내버스에서, 시장 거리에서, 백화점에서, 상갓집에서, 결혼식장에서, 복닥대는 길거리에서 귀를 기울인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 온갖 소리가 뒤범벅되어 스쳐 지나갈 뿐, 어떤 소리도 귀속에 뚜렷이 담기지 않았습니다. 관심을 놓고 살다가 서서히 잊히고 말았습니다. 한데 오늘 지하상가를 걷다가 소녀의 그 말소리가 귀청을 파고들며 발목을 붙들지 뭡니까.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데 계단 중간쯤에 그들이 다시 눈에 띄었습니다. 소녀의 노란 티셔츠가 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아빠는 딸보다 세 계단쯤 위에서 딸이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요. 서너 발치 앞에서 발길을 또 멈췄습니다. 아까는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이번은 앞에 보인 광경에 발길이 멈춘 것입니다. 딸은 한 쪽 다리가 없는 구중중한 걸인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습니다. 이미 걸인의 손엔 우유 식빵 한 덩이가 들려 있었고요. 자기 빵을 쪼개 걸인에게 준 모양이었습니다. 귀퉁이 조금을 떼서가 아니라 절반을 뚝 끊어서 말입니다.

걸인의 얼굴엔 다순 온기가 돌았습니다. 적어도 제 눈엔 그렇게 보였습니다. 빵 한 덩이로 어찌 주린 배를 채울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 빵을 근심하는 자는 온기 묻은 빵 한 덩이만으로도 큰 위안과 힘이 되는 모양입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행인들이 그 광경을 흘끔거렸습니다. 몇 계단 위의 아빠는 그런 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고요.

차츰 부끄러움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좀 전 ‘치, 아빠만 생각해!’, 하던 소녀의 그 말이 머릿속을 지나 가슴께로 서서히 흘러들었기 때문입니다. 아까 아빠가 어쨌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소녀의 앵돌아진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어찌 아빠뿐이었겠습니까. 부모가 자식에게, 선생이 제자에게, 연장자가 연소자에게, 배움이 많은 이가 적은 이에게,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꼭 삶의 본이 되는 것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그 앳된 소녀의 행동이 오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생각을 하게 하였을까요. 지하와 지상의 중간 계단에서 식빵 한 덩이를 앳된 소녀와 늙숙한 걸인이 주고받는 광경을 보면서요.

소녀는 팔랑팔랑 계단을 뛰어 올라갔습니다. 아니 소녀는 노랑 나비였습니다. 지하에서 계단을 딛고 더 밝은 지상으로 올라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아직도 귓전에 맴도는 그 말의 갈피를 되작이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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