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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
탁현수(수필가·문학박사)

2020. 08.19. 09:20:42

오늘도 어김없이 어머니가 드실 죽 보따리를 움켜쥐고 서둘러 병원에 도착했다. ‘보호자증’이라는 명패와 함께 ‘코로나19’에 걸리지 않았다는 응답서가 담긴 ‘QR(Quick Response)코드’를 휴대폰 화면에 띄워 제시한 후 발열체크에 합격해야 만이 병원 입구를 통과할 수 있다.

88세의 연세로 ‘뇌출혈’이라는 병명을 안고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거쳐 40여 일째 병실 생활을 하고 계시는 어머니. 처음 염려와는 달리 의식이 돌아와 중환자실을 간신히 벗어나셨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어머니가 ‘119 구급차’에 실려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하던 날, 8남매 자식들 중 가장 가까이 사는 내가 보호자란에 이름을 적어 올리고 검사와 치료과정의 여러 위험사항에 대비한 서명까지 했다. 어머니의 생명을 놓고 감히 책임을 지겠다는 아주 두려운 일이었으나, 병원과의 약속만이 아니라 어떻게든 어머니를 살려내는 데 온 힘을 다하겠다는 다짐의 마음을 모아 떨리는 손으로 사인을 했다. 다행히 방학 중이라 어머니께서 내게 기회와 시간을 주셨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코로나19’는 보호자 노릇까지도 철저하게 방해했다. 사경을 넘나들고 있는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계시는데 그 복도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못할 정도로 원천봉쇄를 했다. 형제들과 병원주차장에 모여 차마 어머니를 두고 그 자리를 뜰 수가 없어서 새벽녘까지 차 안에서 마음 조이다가 들어오는 것이 보호자로서 최선의 역할이었다.

중환자실에서 병실로 옮기는 날은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기뻤다. 욕심이 욕심을 부른다고 형제들은 아무 때나 어머니께 들락거리고 싶어 했지만, 보호자증을 가진 단 한 명만이 머무를 수 있는 규칙은 삼엄했다. 이래저래 큰딸인 내가 어머니 곁을 가장 많이 지킬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생각해보니 어머니는 8남매나 되는 우리들을 키우면서 양육에서 훈육까지 단 한 번도 보호자로서 당당하게 당신의 역할을 주장하지 못하는 삶을 사셨다. 외아들로 이어 내려오는 집안에서 태어난 우리들은 어머니 품에서 젖만 떼고 나면 철저하게 조부모님의 ‘사랑법’에 의해 길러졌다. 버릇없이 구는 남동생에게 어머니께서 회초리를 든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께서는 온 집안이 떠들썩할 정도로 불같이 화를 내셨다. “니 새끼라고 니 맘대로 매를 들다니…. 그 꼴은 못 본다.” 결국 어머니는 몇 날을 사죄하고야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

해질녘, 마당 모퉁이 샘가에서 막내여동생을 안고 세수를 시키는 어머니를 본 적이 있다. 어머니는 그 어느 때도 볼 수 없는 환한 얼굴로 동생을 씻긴다기보다는 정성스레 물을 발라가며 만지고 쓰다듬고 계셨다. 그 순간이 어른들께 표시나지 않게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또 그 고충을 내가 부모가 되어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유난스런 조부모님의 애착 속에 어머니의 손길이 미치기도 전에 훌쩍 커버린 맏딸.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자취생활을 시작해 결혼 후까지도 동생들을 줄줄이 보살폈으니 어리광 부리고 보호 받아야 할 어머니의 자식이 아니라 조력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쓸쓸한 적도 많았다. 어머니와 나는 평소 다정하게 손을 잡는 것마저도 어색해하며 평생을 살았다.

기나긴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중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의 병실에서야 우리는 두 손을 꼭 잡았다. 피골이 상접해 미소 짓기조차 힘든 얼굴로 연신 내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고 등을 다독이기도 하신다. 마치 60이 넘은 딸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아기를 바라보는 표정이시다. 얼마를 돌아서야 여기까지 왔는지…. 차마 어머니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엉겁결에 목에 걸린 보호자증을 힘껏 쥐며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 엄마 장하다! 참 잘했어. 엄마가 똑똑해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거야!”

어지럼증이 인다며 눈을 감는 어머니의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간절히 소망했다. 우리 모녀가 서로의 ‘보호자’가 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지기를, 아니 아주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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