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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볼펜
김한호(문학박사·문학평론가)

2020. 08.26. 11:54:05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더구나 아름다운 추억이 깃든 물건을 평생토록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군대에 갈 때, ROTC 축제 때 만난 첫사랑의 여인이 자기에게 편지를 쓸 때 사용하라고 선물로 준 초록 볼펜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그 볼펜은 초록빛 ROTC 반지와 함께 내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 중의 하나이다.

군대에서 힘든 훈련을 받는 동안에도 그녀가 준 초록 볼펜으로 편지를 썼다. 그녀는 정성을 다해 답장을 보내왔다. 그녀의 편지는 괴로움의 골짜기와 아픔의 벌판을 헤매다 지친 내 영혼을 위로해 주는 사랑의 메시지였다. 깊은 산속에서 한 달간 훈련을 받을 때엔 낙하산에 보급품과 함께 실려 온 편지는 베스트셀러보다도 더 아름다운 글이었다.

군대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주고받은 편지와 함께 그때 사용했던 볼펜을 모아두었다. 제대 후에 볼펜을 모으기 시작하여 40여 년 동안 1,000여 자루의 볼펜을 모았다. 그중에서 특별한 볼펜을 가려 뽑아 전시회를 두 번이나 열었다. 볼펜을 수집한 까닭은 언젠가 손으로 쓰는 필기구가 사라지고, 기기로 문자를 입력하는 시대에는 지금처럼 흔한 필기구가 귀중한 유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모은 볼펜은 내가 사용했던 볼펜이거나 기념 볼펜 또는 외국 여행을 다니면서 구입한 독특한 볼펜이다. 몽블랑, 워터맨, 파카 등 각종 메이커의 볼펜을 비롯하여 금제 모나미 볼펜, 순은 파카 볼펜, 십장생 자개 볼펜, 중국 칠보 볼펜, 아프리카 흑단목 볼펜, 베트남 대나무 볼펜, 핀란드 순록 뿔 볼펜 등과 꿀벌, 뱀, 곰, 인형, 수박, 주사기, 장미꽃 등 다양한 종류의 볼펜들을 모았다.

볼펜을 모으면서 잊혀지지 않는 사연이 있다. 중국과 수교하던 해에 백두산 여행을 갔을 때였다. 어느 마을에서 버스가 정차하자 아이들이 몰려와 목에 걸고 있는 볼펜을 백두산 산삼과 바꾸자고 졸라댔다. 어쩔 수 없이 북경에서 산 볼펜을 나눠주었다. 인도에서는 가난한 노인에게 수공예로 만든 유리 조각이 박힌 볼펜을 샀더니, 자기가 팔고 있는 볼펜과 내가 입고 있는 잠바와 바꾸자고 했다. 바꿔 입을 옷이 없어 옷을 벗어주지 못하고 볼펜을 다 사주었다.

글을 쓰는 작가가 되면서 필기구에 남다른 애착이 생겼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메모를 해야 했다. 책을 읽고 노트에 기록하거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메모하기 위해서 항상 볼펜과 종이를 가지고 다닌다. 요즘은 스마트폰 메모란에 입력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볼펜이 더 편리하다.

메모뿐만 아니라 기록을 하기 위해서는 필기구가 중요하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붓, 종이, 벼루, 먹의 문방사우를 소중히 여겼다. 인류가 문화와 문명을 발달시킬 수 있었던 것은 지식과 경험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기구는 인류 역사와 함께 진화해 왔다.

필기구는 다양하게 변천해 왔다. 동양에서는 중국 진시황 때 만리장성을 쌓은 몽염이 붓을 발명했으며, 서양에서는 1780년 영국의 해리슨이 강철제 펜을 만들어 사용하다가 1884년 만년필이 만들어졌다. 그 후 1938년 헝가리 신문기자 라슬로 비로가 볼펜을 발명했다. 최근에는 디지털의 발달로 전자펜이 발명되고, 문자문화시대에서 전자문화시대로 바뀌면서 종이책 시대의 필기구가 아닌 기기로 입력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몰입하여 작품을 쓸 때는 기기보다는 필기구가 더 유용했다. 글을 쓸 때 나는 손글씨로 초안을 작성하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 글을 완성한다. 지금도 지난해 문학상을 받았을 때 ROTC 동기회에서 선물로 준 몽블랑 초록 볼펜으로 글을 쓰고 있다. 밤 늦도록 글을 쓰노라면 첫사랑의 여인인 아내가 따뜻한 차 한 잔을 권하면서 내 글을 읽어보고 작품평도 해준다.

젊은 날의 애틋한 사연이 담긴 편지와 볼펜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지나간 날들이 행복했기 때문이리라. 세월이 흘러 황혼이 찾아오면, 초록 볼펜으로 쓴 그리움의 연서를 손주들과 함께 읽어볼 것이다. 그러면서 한 생애를 살아오는 동안 내 삶의 뜨락에 꽃 피우고 열매 맺은 아름다웠던 그 세월을 생각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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