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이 온통 적막 속에 잠겨 드는 일몰의 시간. 혈육과 보낸 고향에서의 하루를 접고 다시 일상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다. 클랙슨 소리마저 유순해진 차들은 하나, 둘 어둠의 침묵 속으로 사라져간다. 날짐승, 들짐승들 역시 서둘러 둥지에 깃들였는지 간간이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숨소리만이 적막을 깨운다.

하늘은 별꽃들을 피워 올려 지붕이 되어주고, 밝음 속에서는 우뚝 우뚝 장엄하게 서 있던 산들도 큰 산이 작은 산을 품어 안아 깊은 심상의 수묵화처럼 선과 색의 경계마저 지워버렸다. 산기슭에 옹기종기 붙어 앉은 사람 사는 마을 또한 그윽한 고요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불빛으로 전해지는 인가(人家)의 표정에는 신분이나 빈부의 차이가 없다. 오히려 작은 오두막에서 전해오는 아슴한 불빛이 더욱 정겹다.

창밖 풍경에 좀 더 잠겨 들고 싶었을까. 창문을 내리고 긴 호흡을 뱉어내는 순간, 길섶에 있던 생명 하나가 헤드라이트 불빛을 피하며 고개를 움츠린다. 모든 것을 품어 안아줄 것만 같은 밤의 아량 속에서도 소외되어있는 누군가가 있다. 주변의 초목들이나 밭곡식들, 어디에도 어우러지지 못하고 머쓱하게 서 있는 촉규화 한 그루. 계절은 가을이 저물어가고 겨울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데 초여름에 한창이어야 할 꽃이 어인 일로 눈앞을 스쳐 갔는지. 분명 인가에서 떨어져나와 홀로 어둠 속에 갇혀있는 촉규화였다. 어떤 척박한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꽃을 피우는 것은 물론, 주인에 대한 의리와 절개가 강하다는 속설로 예부터 문사들의 심상을 넘나들던 꽃. ‘화원의 모든 꽃들이 신분 상승과 부귀를 누리기 위해 집을 떠나버려도 대문 옆에 쓸쓸히 홀로 서서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피고 지고를 반복했다’는 전설의 꽃 촉규화.

그러고 보니 밤길을 달리는 동안 내내 하루를 같이 보낸 동생 생각에 몰두해 있었던 듯하다. 언제부턴가 붉디붉은 촉규화꽃을 볼 때마다 젊은 날의 동생 얼굴이 아릿하게 파고들곤 했다. 나이 30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동생은 어느 날인가 심한 근시 안경을 벗어버렸다.

“세상이 또렷이 보이는 것이 싫어. 모두가 덤벼드는 것 같아.”

동생은 빛이 무섭다고 했다. 그리곤 스스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부셔서 눈을 뜰 수조차 없는 빛 속에 서서 두려움에 떨고 있기보다는 차라리 어두움에 안겨 치유의 시간을 보내는 동생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오히려 안도를 느끼는 순간이 많았다. 언젠가는 건강한 모습으로 걸어 나오리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은, 불꽃이라고도 일컬을 만큼 화려한 빛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상처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화상을 입고 만다. 그런 불꽃이 잦아들어 새까맣고 깜깜한 재로 변했을 때는 자양분이 되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 밤새, 해산의 고통에 시달린 어두움의 배를 가르고 새벽이 열리는 것처럼….

삶의 모퉁이에서 잠시 길을 잃고 주춤거릴 때마다 강렬하게 내리비치는 태양에서는 큰 위안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가물가물 꺼져가는 안쓰럽기 그지없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많은 힘을 주었던가. 빛이 환희와 희망을 안겨주는 승자의 것이라면, 어두움은 그것들로 이어지는 길목의 초입쯤이어서 아픈 이들의 가슴에는 더욱 먼저 다가서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의 전래 동화 ‘해님 달님’에서 친구들은 모두 해님이 되겠다고 했지만, 꼭 달님을 고집했었던 일이 떠오른다. 스스로는 한 줄기의 빛도 가지지 못했으나 해님이 헤프게 낭비해버린 빛을 모아 두었다가 행여 다칠세라 조심스럽게 어두움을 밝혀주던 달님이 무척이나 커 보였다. 그런 달님 옆에는 여러 별들이 모여있어서 밤하늘엔 항상 잔잔한 평화와 이야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동화 속의 달이 되고 싶어지는 이 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인연의 별들과 함께하기 위해 가속기의 페달에 힘을 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