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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원의 현대미술 에세이-질문과 대답<23>영혼과 시뮬라시옹
신을 상실한 현대인, 부모 잃은 고아와 같아

2020. 11.26. 14:48:54

이사악을 제단에 묶어놓고 막 칼을 잡고 죽이려는 순간 천사가 나타나 만류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100세가 넘어 얻은 귀한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고뇌 끝에 이를 실행하던 아브라함이 묘사되어 있다.

장 보드리야르 “신 자체가 시뮬라르크”
시뮬라르크 속에 갇혀 사는 현대인들
신성·인간의 존엄성도 급속히 쇄락


구약 창세기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브라함에게서 아들 이사악이 태어났을 때, 그의 나이는 백 살이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시자,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당으로 가라. 그곳, 내가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가져다 아들 이사악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에 불과 칼을 들었다. 그렇게 둘은 함께 걸어갔다.
이사악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아버지!” 하고 부르자, 그가 “얘야, 왜 그러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이사악이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자, 아브라함이 “얘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 하고 대답하였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곳에 다다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았다. 그리고 나서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다. 아브라함이 손을 뻗쳐 칼을 잡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 하였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백 세 때 얻은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제물로 바치려고 산으로 간다. 제단을 쌓고 장작 위에 이사악을 묶고, 막 죽이려는 순간 천사의 음성을 듣는다. 이 모든 것은 환청일까? 진실일까? 믿음에 기조한 기만일까? 아니면 종교는 본래 가장 소중한 것을 반인륜적으로 희생시키는 것일까?

다시 구약 탈출기를 보면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같은 주제로 마르크 샤갈이 그린 그림. 표현 방식에서 샤갈 특유의 느낌이 살아 있다. 믿음과 사랑 사이의 고뇌가 주제이다.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토르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 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가 불타는데도,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버리지 않을까?’하고 생각하였다.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그 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명동성당 경내에 있는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상. 장동호 작.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모욕을 당하던 예수, 그리고 그의 사후 구원의 메시아로 성스러운 빛을 발하는 이미지는 어떤 종류의 시뮬라크르일까?
하느님은 어떻게 생겼을까? 성경에 묘사된 하느님과의 조우 장면은 늘 음성이나, 불꽃 등으로 신의 존재를 암시하는 정도이다. 신은 무엇이고 또 어떤 일을 하는 존재일까?

장 보드리야르가 쓴 시뮬라시옹을 보면, 신성이 성화상을 통해서 드러나고 시뮬라크르들로 감속되면 신성은 무엇이 될까? 하고 묻는 장면이 있다. 이어서 ‘가시적인 신학에 의해 이미지들 속에서 성육신하는 지고의 발원지로 남아 있을까?’ 하고 되묻고 또 ‘스스로의 화려함과 미혹하는 힘을 펼쳐 보이는 시뮬라크르들 속에서 신성은 증발하여 버리고 말 것인가’라고 되뇌인다.

하느님을 묘사한 성화상이 신성을 대체하게 될 때에 그 원본이랄 수 있는 신성은 어디에 있을까? 과연 신성이 있기나 한 것인가? 하고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진술한다.

“이것이야말로 성상 파괴주의자들이 두려워하였던 점이며, 이에 대한 천년의 논쟁이 여전히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시뮬라크르의 이 막강한 힘, 신을 인간의 의식에서 지워버리는 기능, 시뮬라크르가 문득 보게 한 파괴적이고 말살적인 진리를 성상 파괴주의자들이 감지하였기 때문이며, 결국 본질적으로 신이란 없었기 때문이고, 오직 시뮬라크르만이 존재하고 있었며, 더군다나 신 자체도 시뮬라크르였기 때문이다.”

이 엄청난 반전 때문에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론은 흥미를 끈다. 더군다나 요즈음의 디지털 및 AI 시대에는 가본과 원본의 차이도 명확히 규명하기 어렵다. 가본이 원본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신성에 대하여 어떤 의견을 개진하기 어렵다. 오히려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성모상과 예수의 모습이, 신성을 대신하여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메시지를 주고 있지 않을까?

현대조각가 최종태가 만든 십자가 형태의 예수상. 군더더기 없이 상징적 예수상을 형상화하고 있다.
신 자체가 시뮬라크르였다는 장 보드리야르의 말은 충격적이다. 특히 기독교의 신이 갖는 서구 사회적 관점에서 봤을 때 그 충격은 배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모세가 성경에서 신을 만나는 장면 속의 신은 무엇일까? 그것은 형상화를 배제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 장면 속에서 구체적이다. 또 성경 속에서 말하는 신의 메시지는 매우 구체적이다.

결국 추상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 신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또 구체적으로 형상화해서 예배의 대상으로 삼게 되지만 그것이 신의 신성을 대체하게 되어서 부술 수밖에 없다는 모순에 싸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문제를 떠나서 현대인은 각종의 시뮬라크르 속에 갇혀 살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에게 있어서 신성은 사라지고 없고, 덩달아서 인간의 존엄성 자체도 급속히 쇄락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개개인의 영적인 능력으로 모세처럼 특별한 신성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옛날 같지 않다. 떨기나무는 불꽃 속에 휩싸여 있지도 않고, 그 가운데 하느님이라고 믿을 만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신을 상실한 현대인은 부모를 잃은 고아와 같다. 영혼의 가치를 잃은 존재는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로워도, 아무리 편리한 환경 속에 살아도 갈 곳 없는 동굴 속에 처박혀 울고 있는 고아와 비슷하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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