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완의 발걸음 경계에서

▲신안 임자도 <하편>

아름답고 풍요로운, 한국의 유일한 사막

제방 쌓아 농토 만들어 ‘한국판 네덜란드’

대광해수욕장 폭 300m…마치 중동에 온 느낌

튤립 100만송이 일품 코로나에 축제취소 아쉬워



‘임자도 처녀는 모래 서 말은 먹어야 시집간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고운 모래가 많은 섬이다. 작은 입자여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날아다녀 알게 모르게 모래를 먹고 자란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모래는 강제 공출당하는 슬픔도 있다, 규사를 채취해 유리,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가져갔다. 십수 년 전에는 대도시에서도 고운 모래를 가져가 자연이 크게 훼손됐다고 이야기한다,

섬은 전체적으로 삼각형을 이루며 토질이 고운 모래흙으로 자연산 들깨가 많이 생산된다고 해 ‘임자도’(荏子島)라 불렀다.

지질학자들에 따르면 임자도의 지형은 중동에서나 볼 수 있는 사막의 모습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다고 하며, 그래서 사람들은 임자도를 한국의 유일한 사막이라 부른다. 전국에서 제주도를 포함해 14번째로 큰 섬 ‘임자도’ 포구에 들어서서면 보이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섬 임자도’라는 푯말처럼 굽이굽이 돌아서는 발길마다 아름다운 사연을 마주한다.



◇여섯 개의 섬을 잇고 또 이어 ‘하나의 섬’

임자도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섬이다. ‘육 섬’이라 불리는 여섯 개의 섬을 잇고 또 이어 간척해 하나의 섬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덤프트럭이나, 굴착기도 없던 시절에 삽과 지게만 가지고, 흙과 바윗덩어리를 등짐 지고 와 바다에 부리며 섬과 섬을 이어서 제방을 쌓아 농토를 수백 년 동안 바닷물과 싸워 새로운 땅을 만들었다. ‘한국판 네덜란드’라고 불리는 섬으로 대부분 농지는 해수면보다 낮다.



◇해질 녘 백사장 너머 수평선 장관

선착장에서 5㎞쯤 떨어진 광산리와 대기리, 도찬리로 이어지는 야트막한 언덕배기 너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넓고 깨끗한 순백의 대광해수욕장이다. 12㎞길이의 백사장 폭이 300m가 넘는다. 해수욕장 끝에서 끝까지 걸어가는 볼거리도 쏠쏠하다. 연목도, 민어파시로 유명했던 대태이도와 육타리도, 명도, 육각섬, 고깔섬 그리고 손에 잡힐 듯한 어루미도, 바람막이섬을 만나면 도찬리이다. 맨발로 걸어보자. 그러면 엽낭게, 달랑게들이 모래 구슬을 곳곳에 만들어 놓은 것도 만나고, 게 고동, 털 골뱅이도 볼 수 있다. 운이 좋은 날은 작은 물웅덩이서 어린 치어들도 만나는 기쁨도 있다. 싸목싸목 걸으면 2~3시간 정도, 자전거를 가지고 가면 20~40분 정도 타면 된다.

모래 입자가 고와 바퀴가 모래에 묻히지 않기 때문이다. 걷다 보면 중간쯤에 벼락바위가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다. 거기서 돌아가도 되고, 도찬리에서 공용버스를 타고, 대광해수욕장 가까운 곳에서 내려 걷거나, 진리에서 환승해도 된다. 버스는 드문드문 있어, 꼭 버스 시간을 확인해야 한다.

해 질 녘에는 넓은 백사장 너머로 보이는 수평선에 이름도 아름다운 수많은 크고 작은 유·무인도가 있다. 섬 사이의 섬으로 붉게 타오르는 태양, 그것이 바닷 속으로 들어가면, 넋을 잃고 만다. 서정적 낭만의 섬이 돼 버린다. 두세 시간 걷는 동안에 모랫길은 들물이 되기도 하고, 썰물이 되기도 해서, 꼭 주민들에게 물어서 걷기 바란다.



◇튤립 꽃말 색상 따라 제각각

코로나19 팬데믹만 아니라면, 해수욕장 뒷마당에 핀 100만 송이의 튤립은 봄날의 축제를 만끽할 수 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주말이면 임자 대교가 개통된다. 관계 당국에서도 긴장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작년 내내, 그리고 지난 겨울도 답답하게 보냈다. 시쳇말로 콧바람 쐬러 가기가 어렵게 됐다. 100만 송이 튤립도 ‘짱’ 하면서 꽃송이를 비춰주면 얼마나 좋으련만. 아쉽게도 작년처럼 튤립 축제는 취소됐다.

튤립 꽃말은 매혹, 영원한 애정, 아름다운 눈동자 그리고 박애, 명성 등이다. 꽃의 색상에 따라 의미도 다르다. 빨강은 사랑의 고백, 자주색은 영원한 사랑, 노랑은 헛된 사랑, 흰색은 사랑의 실연, 보라색은 영원하지 않은 사랑이다. 이런 애정을 가지고 내년을 기다리자.



◇홍매화 천지 ‘이흑암리’

면사무소 삼거리 이정표에 ‘이흑암리’라고 쓰여 있다. 이흑암리는 임자도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을 품고 있는 대둔산(320m)과 삼각산(214m)의 산그늘이 커 해가 일찍 넘어가고 어둠이 빨리 찾아온다고 ‘이흑암’으로 이름 지었다. 대둔산 아래 여섯 군데에 마을이 터를 잡고 있다고 ‘육암’, ‘육바구’로도 불린다.

마을이 온통 홍매화 천지이다. 교회 담벼락도, 마을회관도, 동네 어귀 골목도 홍매화가 풍성하다. 이곳이 남종문인화의 산실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진도 운림산방의 소치 허련보다, 우봉 조희룡이 몇 년 먼저 이곳에서 붓을 휘갈겨 남종화를 쳤기 때문이다.



◇임자도, 우봉 조희룡의 작품에 고스란히

우봉 조희룡(1789~1866)은 예에 관한 예송논쟁에 휘말려, 환갑이 훌쩍 넘은 63세 늦은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 간 추사 김정희와 맺은 각별한 친분이 빌미가 돼, 임자도로 온다. 당황한 조희룡은 유배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억울했다. 유배 와서 본 임자도의 생활상도 암울했다. 한동안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다. 이흑암리에 있던 그의 거처는 황토로 지어진 초라한 움집이었다. ‘게딱지 집’(蟹舍), ‘달팽이 집’(蝸廬)으로 불리곤 했다. 그가 머물던 처소의 명칭에서조차 화가의 암울한 처지가 드러난다. 대나무 그림을 그려놓고 그 화명을 ‘노여운 기운으로 대나무를 그린다’라는 ‘노기사죽’(怒氣寫竹)이라 표기한 것은 암울함을 넘어선 그의 분노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이 암울하다고 마냥 절망에 빠져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느 날 우봉은 문을 박차고 나와 이흑암리 남쪽 바다를 바라보고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에 깊이 감동한다. 그리고 초라한 움집 앞 바닷가에서 수많은 갈매기가 비상하는 광경에 매료돼 ‘만 마리 갈매기 소리가 들리는 집’이라는 의미의 ‘만구음관’(萬鷗吟館)으로 바꾼다. 세월이 흐르며, 섬과 섬사람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매화 그림을 선물했다. 섬사람들도 흡족해했다. 시나브로 집집마다 그의 그림이 한 점씩 걸렸다. 조희룡과 지역주민들 사이의 공감대가 이뤄졌다.

그리고 그에 그림의 소재도 매화에서 대나무, 돌로 넓어졌다. 매화에다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버무린 ‘매화도’에 이어 임자도의 자연을 소재로 한 묵죽도, 괴석도를 그렸다. ‘황산냉운도’(荒山冷雲圖)는 유배지에서의 심정과 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화법 역시 갈수록 개성이 묻어났다. 그의 예술세계를 한층 무르익게 한 임자도에서의 유배 생활이었다. 조희룡은 차분히 이론을 정리하며, 절정의 기량을 뽐냈다. 경지에 올랐다. ‘화구암난묵’ 등 산문집과 시집, 그림이론서 등 많은 저술도 이때이다. 그의 대표작품 19점 가운데 8점이 임자도에서 나왔다.

역사는 후세가 보면 흥미로운 점이 많다, 우봉의 유배가 임자도를 조선문인화의 성소로 기억하게 했다. 이흑암리에는 생선 머리를 닮은 어(漁)머리, 숨겨진 마을 은(隱)동 해수욕장도 있다.

대광해수욕장 파라솔과 일몰, 그리고 튤립

우봉 조희룡의 적거지

우봉 조희룡의 적거지

우봉의 ‘홍매대련’. 종이에 담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임자도 민어 조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