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찔레꽃이 산하에 지천이다. 찔레꽃은 장미과에 속해 우리나라 들장미다. 찔레꽃 필 무렵이면 보릿고개가 있어 배고플 때 꽃잎과 찔레 순을 따서 먹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노랫말을 보더라도 우리 민족의 정서와 잘 맞는 꽃이다.

하얀 찔레꽃이 피는 시기였다. 광주에서 다니는 버스가 운행되지 않아 선생님이 학교에 등교하지 못해 수업을 진행할 수 없자 하교 안내방송을 했다. 숙직 선생님은 교실마다 다니면서 당부 말을 잊지 않았다. 공수부대가 담양에 주둔해 있어 집으로 갈 때 삼삼오오 친구들과 짝을 지어 가야 한다고 했다.

중학교 1학년이었다.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면서 친구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소문과 진실을 이야기했다. 학교에서 빨리 끝나 집으로 가는 길에 가끔씩 들렀던 분식집에서 핫도그 사 먹는 것도 잊고 집으로 향했다.

-상처는 민주화 정신으로 승화

1980년 5월의 기억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이 만발했다. 찔레꽃 피는 언덕을 넘으며 광주를 다녀온 부모와 마을 사람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친구들과 나누며 대나무 숲을 지나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대문과 방문을 꼭 걸어 잠갔다.

광주에서 다니던 버스가 며칠 다니지 못했다. 광주에 일을 보러 가셨던 분들은 걸어서 마을로 돌아왔다. 광주 전역에 계엄군이 주둔하고 대학에 계엄군이 진입해 학생을 무조건 잡아간다고 했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그날 금남로에 있었던 시위대는 한마음이 되어 노래를 불렀다.

오빠는 대학교 1학년 연극반이었다. 공수부대가 금남로에 투하됐을 때 동명동 쪽으로 뛰었다. 군인이 발걸음을 맞추어 쫓아오자 살기 위해 한옥집 담을 두 번이나 뛰어넘었다. 마루에서 프로권투 박찬희 선수 방어전을 보고 있던 집주인은 대학생이며 군인에게 쫓긴다 하자 광에 숨겨 주었다.

난 군홧발의 공포를 기억한다. 1987년 6·29선언 전날 밤 난 금남로 시위대에 있었다. 군인들이 단체로 발자국 소리를 내며 도로를 점령할 때 들리는 차박차박 군홧소리 공포의 기억은 지금도 섬뜩하다. 그날 밤 사과탄이 바로 뒤에 떨어져 얼굴에 화상을 입어 1년 내내 피부과를 다녔다. 그때를 기억하면 오빠의 공포는 몇 배였을 것이다.

계엄군을 피해 담을 두 개 넘어 동명동 가정집 광에 숨어 있던 그날 밤 광주에 사는 사촌 언니는 오빠를 데리러 갔다. 이른 아침 아버지는 광주에 가셨다. 옷 한 벌과 모자를 준비했다. 대학생들은 무조건 잡아갔기 때문에 농민처럼 변장을 하고 광주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버지와 오빠는 버스를 타려고 터미널까지 갔다가 뒤돌아섰다. 터미널과 광주와 전남을 잇는 도로는 계엄군이 이미 점령한 탓이다. 아버지와 오빠는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몇 번의 고비를 넘겼다. 광주에서 한나절을 걸어 집으로 오기까지 군인이 있는 곳을 통과할 때마다 자식을 지키고자 하는 아버지의 의지는 절실했다.

돌아온 오빠의 모습은 초췌했다. 그날 이후로 오랫동안 학교를 가지 못했다. 그 후유증이었을까? 오빠는 많이 아팠다. 신장이 나빠져 약을 먹었으며, 2학기 개강이 되어서야 광주로 갔다. 그 후로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래된 기억을 글로 다 담을 수는 없다. 풍문으로 들었던 이야기는 세월을 이겨낸 증언이 그날의 진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며칠 전 하얀 찔레꽃이 핀 시골 언덕길을 걸어 보았다. 찔레꽃을 보면 5·18의 아픔과 슬픔이 아려 있다. 광주시민과 그 시대를 함께 했던 사람들의 가슴속에는 푸른 멍이 있다. 그날의 상처는 승화돼 민주화 정신으로 이어가고 있다.

-죽은 자의 한과 살아있는 역사

화순 세량지 뒷산에도 하얀 찔레꽃이 만발했다. 5월에는 유독 하얀 꽃들이 많이 핀다. 이팝나무, 층층나무, 떼죽나무, 산딸나무, 아카시아 꽃이 올해도 피었다. 인디언 속담에 ‘5월에 하얀 꽃이 피는 것은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 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5월에는 하얀 꽃이 많이 핀다.

광주에서는 5월에 하얀 꽃을 보면 잠시 묵념을 한다. 그날의 역사를 기억하며 산 자는 죽은 자의 영혼을 달래 준다. 광주와 담양을 잇는 5·18 공원묘지에는 매일 산 자와 죽은 자의 이야기가 있다. 아직도 그곳에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40여년의 세월이 가슴속에 맺힌 한을 풀어낼 수 있을까? 찬란한 5월, 광주에는 깊은 슬픔이 있다. 깊은 슬픔을 간직한 그 날의 역사가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