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장구름이 몰고 온 세찬 빗줄기가 들끓는 대지를 시원하게 식혀준다. 정지되어버린 듯 나른하고 느릿하게 움직이던 전원의 여름 풍경도 본능적인 긴장 상태에 돌입한다. 오수(午睡)를 즐기던 뜰 안의 식구들 역시 수런수런 몸놀림이 빨라진다. 거미들은 처마 밑 천장에 바짝 붙어 집을 짓고 모기들은 비교적 흔들림이 작은 담쟁이덩굴 뒤로 몸을 숨긴다.

엉금엉금 담 밑 안전한 곳으로 찾아드는 두꺼비를 보고 있는 사이, 어느새 낙숫물이 마당에 작은 도랑을 만들었다. 개미 한 마리가 엄청난 사태 앞에 갈 길을 잃고 허둥거린다. 준비성이 강한 것이 그들의 본성이건만, 무엇에 넋을 빼고 있다가 무리에서 이탈되어 저토록 쩔쩔매고 있는 것인지. 연민인지, 동질감인지 장독 옆에 서 있는 명아주 풀을 꺾어 조심스럽게 다리를 놓아주었다. 다급하게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쪼르르 건너 간신히 피신한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물에 흠뻑 젖어 난작난작 멀어져가는 개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80년대 초, 민주화를 외치는 젊은이들과 그것을 제지하려는 권력 사이에서 국민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그 무렵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멜로디 하나가 거리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였다. 연일 보도되는 슬픈 소식들 앞에서도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그대 지키리” 하고 따라 부르다 보면 그저 몇 구절의 리듬만으로도 힘이 솟았다.

다리는 화합과 소통으로 향하는 염원의 길목쯤이라고나 할까. 생각이나 이념, 믿음과 사랑 등의 관계 위에 서서 늘 듬직하고 헌신적인 매개 역할을 한다. 단절된 세상이나 교류가 없는 곳엔 아예 다리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소설 ‘태백산맥’을 읽으며 가장 의미 있게 다가왔던 부분 또한 작품 속에 나타나는 벌교읍의 여러 다리였다. 동네 건달들의 세력다툼으로 결투를 벌이던 철교도 등장하고, 쟁쟁한 이념대립의 현장으로 다리 아래 강물이 핏빛으로 낭자했다는 ‘부용교’도 등장했으나, 빨치산 대장 염상진이 지주들에게 수탈해온 쌀을 쌓아놓고 민초들에게 나누어 주던 ‘횡갯다리’는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인상적인 다리이다. 이쪽과 저쪽, 즉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란 불변할 만큼 엄격한 것이겠지만, 민중을 화두에 두고 접근할 때만이라도 화합과 소통을 염원하는 작가 의도가 절실하게 담긴 상징의 다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음의 문을 용기 있게 열고 건너보면 새로운 세상과 만날 수 있는 다리의 마력 때문일까. 우리는 늘 다리 밖의 세상을 동경한다. 그뿐인가. 평생을 두고 기웃기웃 미지의 다리를 찾기 위해 헤매기도 한다. 대부분 성취를 위한 수단이라고들 쉽게 말해버리곤 하지만, 어쩌면 내면의 고독을 떨쳐 내고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본능적인 몸부림이 아닐는지.

자라는 동안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아온 우리로서는 생각만 해도 바들바들 떨리는 것이 이념이었다. 90년대 말, 그 무서운 이념을 뛰어넘어 노 사업가가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소 떼를 몰고 건너던 임진각 ‘통일대교’는 보기 드문 용기의 다리이고 감동의 다리였다. 영화 속의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싹틔우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나,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오작교’ 역시 사랑과 믿음이 놓은 아름다운 다리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거룩한 다리는 자신을 밟고 그 누군가가 무사히 건너가길 바라는 희생의 다리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어머니의 다리, 청출어람(靑出於藍)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스승의 다리,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봉사의 다리가 그것이다. 맹모(孟母)나 석봉의 어머니, 헬렌 켈러를 가르쳐 낸 위대한 스승 설리번, 언제나 못 가진 자들의 편이었던 데레사 수녀, 모두가 세상에 둘도 없는 숭고한 다리들이다.

작은 개울의 징검다리라도 되려고 노력하며 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