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뒷자락을 부여잡고 돌발적으로 찾아온 장맛비. 후텁지근한 대지를 그나마 시원하게 식혀줍니다. 징징하고 지루한 것이 장마라고들 하는데 반기지 않는 손님인 줄은 아는 모양입니다. 연일 보도되는 비의 난폭한 모습은 이제는 더할 수 없는 공포입니다.

기억 속의 비는 늘 설렘이고 기다림이었습니다. 지친 일상을 어루만지며 잠시 쉬어가게 하는 선물 같은 존재였다고나 할까요.

비 내리는 날은 무엇보다 조금은 느슨해진 심신으로 정서의 호사를 누릴 수 있어서 좋습니다. 터무니없는 한 생각에 골똘히 빠져보는 것도, 조금은 벅차다 싶은 이상을 따라 날갯짓해보는 호기로움도 비가 오는 날엔 어색하지 않습니다.

비의 그런 마력은 철마다 시시때때로 다른 얼굴로 다가와 깊숙이 감성을 적셔줍니다. 수줍은 듯 연초록 잎새 위를 또르르 구르는 봄비는 어린 날의 풋풋함이 떠오르고, 한여름 뭉게뭉게 피어나는 흰 구름을 몰아내고 한바탕 쏟아지는 소낙비는 건장한 젊은이의 삶처럼 열정적이고 상쾌합니다. 긴 바바리코트 깃을 한껏 세우게 만드는 가을비는 삶의 뒤안길을 헤매다가 문득 회억의 언덕을 넘는 중년의 중후한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슬픔도 기쁨도 담담하게 받아들여 승화시키는 완숙미, 그래서 가을비를 비 오는 날의 대표적인 풍경으로 여기는지도 모릅니다.

비 내리기 전, 습기를 가득 머금고 머리채를 나부끼며 갈팡질팡 휘날리는 남풍. 그 마파람이 가량없이 좋기만 한 어린아이의 하굣길은 항상 시끌벅적했습니다. 회오리까지 동반해 마구잡이로 불던 바람 갈퀴에 한두 줄기씩 섞여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려고 동으로 서로 펄쩍펄쩍 뛰곤 했지요. 책가방을 멀리 던져놓고 달리고, 또 던지고 달리기를 실성한 사람처럼 반복하며 깔깔거렸습니다. 인간 본성에 한층 충실해진다는 정신착란 환자가 비 오는 날 헤죽거리며 돌아다니던 모습과, 티끌 한 점 없이 해맑게 껑충거리던 아이의 행동을 연관 지어 봅니다.

유록의 숲에 내리는 오월의 비. 그 빗속을 헤매는 갈래머리 여학생이 있습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숲에 속삭이듯 토닥토닥 내리는 빗소리는, 숨이 콱 막혀버릴 것 같은 환희였습니다. 감격에 겨워 “우와! 무지개 빛깔로 비가 내리네!”를 연발했지요. 아름다운 숲과 건강한 청춘과의 만남에 가교역할을 했던 비. 그 눈부신 교감은 굳이 이양하의 ‘신록 예찬’을 들먹일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도심 공원 숲을 적시는 가을비. 대중가요의 노랫말이기도 한 ‘가을비 우산 속’을 동경하는 묘령(妙齡)의 여인이 있습니다. 비 내리는 늦가을 오후, 은행잎을 닮은 노란 우산을 쓰고 호젓한 공원 모퉁이를 걸을 때면 그 누구도 시인이 될 수밖에요. 불현듯 비를 피해 우산 속으로 뛰어든 사람이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오마 샤리프’를 닮아있기를, 아니 그런 일이 일어나 주길 소망하며 한껏 우수에 젖어 들곤 했습니다.

비 내리는 풍광을 예찬하는 불혹의 여인이 있습니다. 밖이 내다보이는 커다란 창문과 푹신한 의자, 그리고 따뜻한 차 한 잔이면 봄비 내리는 긴 하루쯤은 거뜬합니다. 프랑스 여가수의 부드러운 목소리라도 곁들여지는 날은 금상첨화지요. 콩깍지 안에 숨어 앉아 튼실하게 알갱이를 키우는 완두콩의 비밀처럼 혼자서 가질 수 있는 알찬 시간이었습니다.

추억의 비를 맞고 사는 중년의 여인이 있습니다. 뜰 안의 빗소리에 우두망찰 귀만 기울입니다. 달려 나가 흠뻑 젖어볼 생각도, 꿈을 꾸어볼 엄두도 나지 않습니다. 몰려왔던 밀물이 서서히 썰물로 사라져가는 뒷모습이 아득합니다. 하지만 그다지 쓸쓸하거나 허망하지만은 않습니다. 밀물이든 썰물이든 파도의 파문이나 노랫소리는 여전하니까요.

자연이 부르는 영원불멸의 노래 빗소리. 그 노랫소리만 울려오면 언제 어디서건 연초록 숲이 펼쳐진 세월의 강둑을 서성거립니다. 그리곤 작은 소녀가 되어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지요.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