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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강변에서
탁현수 수필가·문학박사

2022. 03.23. 17:48:23

햇살을 쫓아 강변으로 나왔다. 감기, 미세먼지 운운하는 식구들 성화에 동장군을 맞으러 가는 차림새지만, 마음만은 이미 한 마리 나비가 되어있다. 꽃샘의 매운 바람결을 받으며 천천히 걷다 보니 문득 자연의 일원 중에 사람이 가장 게으르다는 생각이 든다. 더디 오는 봄과는 달리 강물은 표정도 다채롭게 흐르고, 강 둔치에는 어느새 꼬마 야생화들이 벙글고 있다. 봄까치꽃, 냉이꽃, 별꽃, 꽃마리, 광대나물, 제비꽃 등등. 이름만큼이나 조촐하고 해사한 봄 동산을 펼쳤다. 언 땅을 녹여내며 전령사로 오는 걸음걸이에 어디 삽상한 봄 훈풍만 불었겠는가.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는 꼬마 야생화들. 최대한 낮은 자세로 엎드려 찬찬히 들여다보니 자연의 시각에서 보면 변장 수준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겉치레가 부끄러워진다. 꾸밈없는 민낯으로도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저들에게 세상의 언어를 모두 동원해 찬사를 보내고 싶다.

강변에는 꽃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강물과 둔치의 경계쯤에는 키 큰 풀숲들이 누렇게 변색 되어 가을 황금 들판을 연상하게 한다. 초록들이 앞다투어 피어나는 소생의 풍경과는 아무리 보아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광경이다. 좀 더 바짝 다가가 유심히 살펴보니 지난해 무성하게 우거져있던 갈대의 사체들이다. 그들은 이미 무릎아래 푸르디푸른 새 생명을 잉태하여 품어 안고 있다.

사람들 역시 목숨줄을 놓는 최후의 순간까지 절실하게 후손을 부여안고 그들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해하지 않던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갈대의 주검들이 봄날의 강변에서도 당당하게 서 있는 것 또한 꿈과 희망을 그렇게 옹골차게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렷다.

아프리카의 ‘스와힐리족’은 사람이 죽으면 ‘사사(sasa)’의 시간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사사의 시간에서는 육체적으로는 죽었지만,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한 아직 살아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들에게 진정한 죽음은 ‘자마니(zamani)’의 순간 이후부터다. 죽은 자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영원한 침묵과 망각에 이르는 자마니의 시간을 비로소 죽었다고 한다. 우리가 죽은 자의 제사를 지내는 이유도 그들이 말하는 사사의 시간을 좀 더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닐지.

강변에 마른풀로 서 있는 갈대들은 마냥 죽은 것이 아니라 지난해 푸르렀던 기억과 미풍에 춤을 추며 즐거웠던 시간을 공유하는 중이었다. 언젠가는 그 기억마저 사라져 어둠의 시간으로 접어들겠지만, 그들의 무릎아래는 푸르디푸른 새순들이 자라나고 있어서 바라보는 마음이 슬프지만은 않다.

삶과 죽음은 공존한다. 얻은 것과 잃어버린 것 또한 공존한다. 내 마음의 강변에도 키 작은 야생초들이 푸른 빛으로 깨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이 봄날 지난날에 대한 후회도, 연민도 의연하게 나부낄 수 있도록 마음자리를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아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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