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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모내기
탁현수 수필가·문학박사

2022. 06.23. 09:20:19

풀무치 한 마리가 공중 곡예를 휭- 돌다가 저만치 내려앉는다. 커다란 물 주전자를 들고 낑낑대던 여자아이는 신발을 벗어들고 살금살금 까치발 걸음이다. 어느새 알아차리고 포르르 날아가 버리는 풀무치를 멀거니 올려보다가 시루봉에 걸린 흰 구름의 그림 솜씨에 넋을 잃어버린다.

어머니와 윗말 당숙모는 밥과 반찬 광주리를 머리에 인 채 앞장서고, 아랫집 경식이 오빠는 술과 찌개를 지고 휘파람을 불며 뒤따른다. 반질반질한 황톳길을 돌아 ‘비암들’을 건너면 봇둑까지 물이 찰랑거리는 ‘상보’ 들판이 한눈에 펼쳐진다.

뱀이 유난히 많아서 붙여진 이름 비암들. 써레질 끝에 벙벙히 물을 가둬놓은 매끈한 논에 혀를 날름거리며 살래살래 헤엄쳐가는 물뱀, 논둑 음침한 곳에 새끼를 까서 구물구물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늙은 뱀, 유독 민첩해서 ‘스르르’ 소리와 함께 길옆 찔레꽃 숲으로 몸을 감추는 꽃뱀, 길가에 능청스럽게 축 늘어져 버티고 있는 능구렁이. 온갖 들꽃과 송사리, 올챙이 등 호기심 천국인 논둑길에 그놈의 뱀만 사라져 주면 마냥 즐거울 것 같았다.

어머니의 채근에 끌려 봇둑에 도착해 보면 밥을 기다리는 동네 아이들이 모를 내는 사람들의 곱은 됐다. 푸르러 가는 들판의 인심인 고깃국에 쌀밥, 모처럼 만의 다디단 특식이었다.

“허이, 허이-”

못줄잡이의 구령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손놀림은 어떤 춤사위가 그보다 흥겹고 진실할까. 동네 개들까지도 바빠진다는 신명 나는 소생의 한철이었다.

모내기 철이면 나는 혼자만의 은밀한 비밀 하나를 수행하기 위해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렸다. 논 귀퉁이 후미진 곳에 어른들 몰래 모 몇 포기씩을 심어놓고 추수철까지 들여다보는 재미란…! 어른이 다 된 기분이랄까, 순전히 나만의 오롯한 1년 농사였다.

어느 해였던가. 벼꽃이 필 무렵 그 비밀을 엿보다가 까무러칠 뻔했다. 기대했던 벼꽃은 어디 가고 피꽃만 너울너울…. 어른들이 모를 내다가 논둑에 던져버린 피들을 벼로 알고 잘못 심은 것이었다. 그 암담했던 유년의 경험은 평생 농부의 심중을 헤아리는 척도가 되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세월을 돌고 돌아 허연 귀밑머리를 이고서야 겨우 고향의 들판에 섰다. 한데 그 많던 이야깃거리도, 땀 흘리며 신명 나게 뛰어다니던 사람들도 모두 사라지고 산천마저 숨을 멈춘 듯 적막이 흐른다. 겨우 두 사람의 인부가 두부판 같은 어린 모들을 이앙기에 싣고 기계 소리만 요란하게 온 들판을 헤집고 있다. 혀를 날름거리던 뱀과 올챙이, 송사리들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목이 빠지게 점심을 기다리며 까만 얼굴에 눈만 반짝이던 아이들의 하얀 웃음소리가 환영처럼 밀려왔다가 멀어져 간다.

점심을 먹던 봇둑에 두 다리를 죽 뻗고 앉아서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나마 아직 하늘빛은 푸르렀고, 시루봉의 흰 구름과 산들바람의 숨바꼭질도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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