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더미 위 움막서 살던 가난한 소년공 ‘대한민국호’ 명운의 키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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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더미 위 움막서 살던 가난한 소년공 ‘대한민국호’ 명운의 키 잡았다

주경야독으로 사법고시 합격
성남시의료원 기득권에 막히자
인권변호사서 정치로 향로변경

제21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재명은 1964년 12월 22일 경북 안동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이후 5세 무렵인 1970년경, 가족과 함께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당시 광주군 중부면 지역)로 이주했다. 가정 형편이 극도로 어려웠던 이재명 가족은 달동네, 즉 무허가 판자촌 지역에 둥지를 틀었다. 이재명은 여러 인터뷰에서 이 시절을 “쓰레기 더미 위에 움막 짓고 살았다”고 회고했다.

성남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이재명의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고, 어머니는 허드렛일로 생계를 도왔다. 다섯 형제도 각자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이재명은 등록금이 없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또래 친구들이 등교하던 시간에 이재명은 공장으로 출근했다. 소년공이 된 것이다. 소년공으로 오전에는 일하고, 밤에는 고무신 배달 아르바이트로 10대를 보냈다.

이재명은 소년공 시절 입은 장애로 병역 면제(5급 전시근로역) 판정을 받았다. 유독성 화학물질(청산가리계 접착제 등)을 다루던 일을 했는데, 보호장비 없이 이 물질을 다루다가 팔과 손가락이 제대로 펴지지 않은 영구적 장애를 입었다. 현재도 왼팔이 제대로 펴지지 않고, 손가락 마디가 휘어 있으며, 일정 근력 이상을 가하면 통증이 온다고 알려져 있다.

신발공장, 고무공장, 재봉틀공장 등을 전전하며 소녀공의 삶을 이어가던 이재명은 “나를 바꾸려면 공부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라디오와 참고서로 독학해 중졸,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이후 장학금을 받아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한 뒤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재명은 지역 사회로 돌아가 노동자와 서민을 대변하는 인권변호사가 됐다. 이재명은 노동자로 일하며 겪은 차별과 고통, 그리고 사회 시스템이 자신 같은 사람을 보호해주지 못했다는 절망 속에서 약자를 위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한다.

‘인권변호사 이재명’에서 ‘정치인 이재명’으로 인생 항로가 바뀐 이유는 성남시의료원 때문이다.

이재명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성남시의료원은 제 정치의 출발지입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이 글에서 그는 “제가 인권변호사로 지내다가 시민운동에 뛰어들 무렵에 성남 본시가지에 있던 종합병원 두 곳이 폐업했다”며 “이때 저도 공동대표로 주민들과 함께 성남시립병원 설립 운동을 시작했지만 당시 시의회는 최초의 주민발의 조례를 단 47초만에 날치기로 부결해 버렸다”고 회고했다.

이재명은 한 인터뷰에서 “현실을 바꾸자. 기득권 세력은 이익이 없는 한 국민의 건강과 생명에 관심이 없다. 저들이 하지 않으면 우리 손으로 바꾸자. 다른 이에게 요청할 것이 아니라 시장이 되어 내 손으로 바꾸자고 다짐했다”고 했다.

성남시의료원 관련 조례가 시의회에서 47초만에 부결되자, 시장이 되서 추진하자는 마음 먹고 시장에 도전했다. 이재명은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2013년 11월 성남시장 자격으로 성남시립의료원 기공식에 참석해 버튼을 눌렀고, 2017년 하반기 성남시의료원이 문을 열었다.

이재명은 시장 취임 직후 파산 직전이던 재정 안정을 위해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청년배당, 무상교복, 공공산후조리원 등 선도적인 복지정책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2018년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당선되며 광역단체장으로 발돋움했다. 기본소득형 농민수당, 지역화폐 활성화, 공공개발 이익 환수제 등을 도입해 공정과 실용의 브랜드를 강화했다. 코로나19 시기에는 전국 최초로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해 실험적 행정가로서의 이미지도 굳혔다.

이재명이 중앙 정치 무대에 이름을 알린 것은 박근혜 정부 시절 발생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때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태를 강도 높게 비판하며 “국민이 주인인 나라에서 대통령이 법 위에 있을 수 없다”, “헌법과 법치에 따라 신속한 탄핵 절차가 진행되어야 한다” 등 사이다 발언으로 주목받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진 2017년 대선에 출사표를 던진 이재명은 민주당 경선에서 문재인, 안희정에 이어 ‘의미 있는 3위’를 기록했다. 이때 정치 체급이 한 단계 올라갔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친형 강제 입원‘ 관련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돼 2심에서 당선무효형을 선고받았을 때는 정치 인생의 위기를 맞았으나, 2020년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하고 무죄를 확정받으며 고비를 넘겼다.

2022년 대선에서는 민주당 후보로 본선에 진출했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와 벌인 민주당 경선은 ‘명낙 대전’이란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치열했다.

경선 과정에서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 형수 욕설 파문, 기본소득 등 급진 정책에 대한 당내 반발 등 ‘악재’가 쌓였고, 경선 후유증으로 본선에서 ‘원팀’이 되지 못하면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에게 0.73% 차이로 석패했다.

이재명은 대선 패배 후 정치적 퇴진 대신, 정면 돌파를 선택하며 당내 권력 중심으로 이동해 민주당 대표로 선출됐다. 민주당 내 ‘반명’(반이재명)계는 자신의 사법리스크를 방어하기 위해 기존의 정치 문법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대선에 패한 정치인들이 일정 기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는 게 관행이었는데, 이재명은 정반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로 국회에 입성한 이재명은 2023년 2월과 2203년 9월 두 차례 검찰이 제출한 체포동의안의 당사자가 된다. 2023년 2월 체포동의안은 부결됐으나, 9월에는 가결돼 정치 여정의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영장실질심사에서 구속영장이 기각되면서 기사회생한다.

무수한 비판 속에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과 당 대표를 지내며 ‘담금질’의 시간을 거친 이 후보는 이 기간 흉기 피습 사건을 겪는 등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만, 2024년 총선을 압승으로 이끌며 당내 입지는 더욱더 굳건해졌다.

‘12·3 비상계엄’ 선포로 인한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파면으로 치러지게 된 ‘6·3 대선’민주당 경선에선 89.77%란 압도적 득표율로 후보로 선출됐다. 이재명이 2025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것은 단순한 인기나 팬덤 효과를 넘어 총선 성과에 기반한 리더십과 현실적인 전략 선택의 결과라는 평가다.

여기에 대선 기간 공직선거법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며 오랜 기간 그를 끈질기게 괴롭힌 사법리스크도 해소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재명은 “그냥 이름만 있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진짜 대한민국, 진정한 주권자의 나라를 만들고 싶다”며 출마한 이번 대선에서 국민의힘 김문수,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흙수저 소년공 출신이 이끌 대한민국이 어떻게 변화될 지 기대된다.

변호사 시절이던 1990년 셋째 형수의 소개로 숙명여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부인 김혜경 여사를 만나 결혼해 슬하에 두 아들을 뒀다.
김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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