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극복·주체적 삶 살다간 여성독립운동가 발자취 ‘감동’
기획

차별 극복·주체적 삶 살다간 여성독립운동가 발자취 ‘감동’

광주여성가족재단·전남매일 공동기획-길에서 만나는 광주여성 100년의 역사
③ 백단심길-항일과 독립을 위한 꺾이지 않는 의지
남성중심 사회속 주체적 역량 발휘
김마리아 박애순 윤형숙 등 대표적
헌신 여성들 활동 조명 안돼 아쉬움

양림동 소녀상
“유관순 누나, 언니”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있는가. 그렇다면 “안중근 형, 오빠”라는 단어는? 유관순 열사는 1919년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투쟁열사임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열사라는 존중의 단어보다 “누나, 언니”라는 단어와 함께 언급된다. 이렇게 여성들의 업적은 역사에서 축소돼 기록되고 알려지거나 남성들의 보조적인 역할로만 비춰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편향적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최근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들을 발굴·연구하고 그들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알리는 작업들이 진행 중이다. ‘광주 여성길’도 그 중 하나다. ‘광주 여성길’은 지난 2022년부터 광주여성가족재단이 운영하는 광주여성 근대역사탐방 프로그램이다. ‘광주 여성길’에서는 근대 광주 여성 교육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두홉길’, 광주 여성독립운동 발자취를 따라 걷는 ‘백단심길’, 광주 학생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홍단심길’을 운영하고 있다.

3·1 만세운동 길


●선교사들 여학교 등 설립…여성인권 소중한 첫걸음

백단심길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인생을 바친 광주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길이다.

백단심길은 양림동 소녀상에서 시작해 숭일학교 옛터~3·1운동탑~3·1운동 아리랑길~수피아여고~최흥종기념관까지 이어진다. 대한 독립을 위해 여성들이 걸어왔던 길을 직접 걷다 보면 누구보다 단단했던 여성들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광주 양림동이 언제부터 광주 항일운동 뿌리가 됐을까. 100여 년 전 미국의 선교사들이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배를 타고 조선 땅으로 들어왔다. 항구가 있는 목포에 자리 잡고 이후 내륙으로 이동했다. 선교사들은 당시 전라도에서 가장 컸던 나주로 향했지만 나주 유림들의 반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그 옆 도시 광주로 오게 됐다.

그러나 광주에서도 광주읍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읍성 밖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마을에 터를 잡았다. 읍성 안에서 혐오스러운 물건을 버리거나 전염병에 걸린 시체 등을 나무에 묶어두던 풍장(風葬)터였던 양림산 아래 양림동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교회를 비롯해 서양식 근대 교육 기관, 병원 등을 만들어 지역 주민을 위해 봉사했다. 이때 생겨난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이 숭일학교(남학교), 수피아여학교(여학교)다. 당시 대다수 여성들은 멀쩡한 이름도 없었고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을 수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이 생긴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여성인권을 위한 소중한 한걸음이었다.



지난 7일 열린 106주년 3·10 광주 만세운동 재현 행사.
●1919년 수피아여학교서 광주만세운동 첫 출발

1919년 광주 만세운동은 바로 이 양림동에 위치한 수피아여학교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경에서 조선 독립을 위해 유학생들이 제작한 ‘2·8 독립선언문’을 가져온 김마리아는 당시 수피아여학교 교사였던 언니 김함라에게 이를 전달했고 그들의 고모 김필례는 남편 최영욱(최흥종·최영온 동생)과 함께 독립선언문을 복사해 3월10일 오후 2시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 교사·학생들과 함께 광주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수피아여학교 교사와 여학생 23명이 기소됐고 22명이 4개월~1년6개월 징역을 언도 받았다. 그 중 최고 징역에 언도된 사람이 수피아여학교 교사였던 박애순·진신애였다.

박애순은 목포 정명여학교와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한 뒤 수피아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학생들에게 자주독립 당위성을 강조하며 광주 만세운동 계획을 철저하게 세운 인물이다. 수피아여학교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비밀리에 옥양목 하얀 치마에 태극기를 그려 만들고 거리에 나온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광주 만세운동 선두에 섰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는 큰언니 김함라가 교사로 있던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부임해 광주여성 교육 계몽에 힘썼는데 2·8독립선언서를 전국 각지로 배포한 이후 여성 비밀결사인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우리 부인도 국민 중 일분자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할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고 후퇴할 수 없다”는 설립 취지문을 채택해 대한민국 국권을 위해 여성들도 일어나 앞장서도록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했다.

광주 3·10만세운동에서 앞장선 학생 중 윤형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윤형숙은 수피아여학교 고등과 2학년 재학 중 광주 3·10만세운동에 참여해 시위대 선두에 서서 전단지를 나줘 줬으며 만세운동 중 일제 헌병이 휘두른 칼에 왼팔이 잘려 피를 흘리고 있는 와중에도 만세운동 행진을 멈추지 않았다. 일제는 윤형숙을 전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생도 윤혈녀(尹血女)로 기록했다.

지난 7일 열린 106주년 3·10 광주 만세운동 재현 행사.


●수많은 여성들 ‘이름없는 활동가’로 앞장

수피아여학교는 여성들에게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주성을 심어줬고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가르친 의미 있는 장소였다.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교육을 통해 여성들이 시대와 사회가 가하는 차별과 탄압을 극복하고 가부장과 유교의 제도를 깨고 나와 학교, 사회, 나라를 변화시키기 위해 움직였다. 이곳에서 교육받은 지식인 여성들은 광주 지역 독립 운동을 주도했으며, 여성을 위한 인권 운동에 앞장섰다.

광주 기독교와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오방 최흥종이다. 광주 첫 남장로교 장로이자 목사로 평생을 한센병 퇴치와 빈민구제, 독립운동, 선교활동, 교육운동에 헌신한 삶을 살았다. 최흥종 일가족은 항일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흥종 누이인 최영온과 그의 남편 정해업, 아들 정의은, 정율성, 딸 정봉은, 동생 최영욱, 그의 아내 김필례까지 가족들 모두가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한 사실이 역사적으로 기록돼 있다.

이들이 독립운동을 하는데 어머니이자 누이인 최영온의 역할이 정신적, 물질적으로 큰 부분을 차지했을 것으로 유추되지만 최영온의 일생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수많은 여성들이 최영온처럼 이름 없는 활동가로 살다갔을 터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성은 모든 활동이 기록되고 조명되지만 그들과 함께 역사를 썼던 여성들은 여전히 그렇듯 지워지고 그림자처럼 살았을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과거와 현재는 이어져 있고 치열했던 과거가 없이는 현재도 없다.

여성들은 교육을 못받는 게 당연했고 큰 목소리조차 낼 수 없이 그림자처럼 살아갈 것을 강요 당했다. 강요인지 조차 모르고 당연시 했던 시절을 살았던 여성들이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본인의 이름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가르치고 돕는 일에 일생을 바쳤던 여성들 덕분에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었다.

현재 당연하게 누리는 모든 것들은 과거 우리 조상들이 그토록 원하던 권리였다. 그들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다.

광주 여성길 ‘백단심길’을 함께 걸으며 이곳에서 나라를 위해, 여성을 위해 투쟁하던 여성들이 있었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오인정 광주여성길 해설사



수피아여학교 교사로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했던 박애순 . 출처=공훈전자자료관
수피아여고 3·1 운동 기념상

오늘의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