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5월 민주화를 외치며 목포역 앞 도로를 가득 메운 시민들. 목포의 민주화운동은 목포역 광장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
1) 계엄군 만행과 광주참상 속속 전해지다
12·3비상계엄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5·18사적지를 찾는 발길이 부쩍 늘었다. 방문객들은 광주 금남로 일대와 5·18민주묘지를 주로 찾는다. 광주에는 전남대학교 정문, 옛 전남도청과 민주광장, 상무대 옛터 등 32곳이 5·18사적지로 지정돼 있다. 사적지는 전남지역에도 있다. 모두 8개 시·군 29곳이 지정돼 있다. 5·18은 광주를 중심으로 전남도민이 함께 싸운 민주화운동이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전남도의 5·18사적지를 찾아간다. 편집자 주
2024년 12월 3일.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기 전, 난데없는 비상계엄 선포…. 가짜뉴스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낮에 무슨 일 있었나? 아무 일이 없었다. 하루 전날에도 별다른 일 없는 일상이었다. 비상계엄 선포 요건인 전시나 사변에 준하는 상황은 전혀 없었다.
1980년 5월 17일 밤도 그랬다. 전두환 신군부는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내렸다. 그날 전국 대학가는 여느 때보다 조용했다. 시위도 없었다. 전시나 사변에 준하는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
![]() 1980년 5월 해남교육청 앞 광장(현 군민광장). 해남군민들이 광주 시위대로부터 광주참상을 전해듣고 있다. |
●전두환, 80년 5월 17일 계엄 확대
비상계엄 확대는 전국을 일순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국회는 탱크를 앞세운 군인에 의해 통제됐다. 국회의 정치활동도 금지시켰다. 김대중, 유시민 등 정치인과 학생 2,700여명은 예비검속돼 잡혀갔다. 전국 주요 기관과 대학에는 공수부대가 배치되고, 학생들의 학교 출입을 막았다. 밤사이 이뤄진 일이었다. 모두 불법이고 위법한 행위였다.
지난겨울 비상계엄을 다시 생각한다. 시민과 야당의 발빠른 대처로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지만, 공포는 계속됐다. 그날 이후 우리 사회는 대혼돈 속으로 빠져 들었다. 우리 일상도 지금껏 그날의 시간 속에서 헤매고 있다. 80년 당시의 비상계엄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다.
![]() 나주 영강삼거리에 세워져 있는 5·18사적지 표지석. 전남도내 사적지에도 광주와 같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
●열흘동안 반독재 민주화 투쟁
5·18민주화운동은 부당한 국가권력과 신군부의 집권 음모에 맞선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었다. 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 항쟁을 벌였다.
5월 21일 석가탄신이었다. 옛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가 시민을 향해 집단 발포를 했다. 우리 군대가, 우리 국민에게 총을 쏜 것이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병원은 부상자와 시신으로 넘쳐났다.
시민들이 무장을 한 계기다. 시민들은 나와 내 가족, 이웃을 지키기 위해 손에 무기를 들었다. 광주 인근 나주, 화순, 영암 등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무기를 꺼냈다. 시민군이 결성됐다.
계엄군의 만행과 광주 참상은 전남 곳곳으로 전해졌다. 당시 광주는 전남의 도청소재지였다. 광주와 전남은 하나의 생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시군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일부 지역민은 광주로 달려가 항쟁에 참여했다.
![]() 나주 영강삼거리에 세워져 있는 5·18사적지 표지석. 전남도내 사적지에도 광주와 같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
●일부 지역민 광주로 진출 항쟁 참여
광주와 함께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던 전남도내에 5·18사적지가 지정돼 있다. 목포, 나주, 화순, 강진, 해남, 영암, 무안, 함평 등 8개 시·군 29곳이다.
목포에는 목포역, 중앙공설시장 옛터, 동아약국과 안철 선생 집터 등 5곳이 지정됐다. 나주에는 옛 금성파출소 예비군 무기고 등 5곳, 화순엔 너릿재 등 3곳이다. 해남 우슬재와 상등리 국도변, 영암 도포 상리제 등도 사적지다.
80년 5월 목포에는 광주 상황이 바로 전달됐다. 5월 21일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 이후, 광주의 차량시위대가 목포에 도착했다. 안철의 집에선 재야활동가들이 모여 민주화시민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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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항쟁은 광주와 비슷하게 전개됐다. 광주에 지휘본부 격인 전남도청이 있었다면, 목포에서는 목포역이 그 역할을 했다.
당시 목포역사 2층에 항쟁지도부와 상황실을 갖춘 목포시민민주투쟁위원회가 설치됐다. 중앙공설시장 상인들은 시위대에 김밥과 도시락, 음료 등을 제공하며 격려했다.
나주의 옛 금성파출소 예비군 무기고는 시민들이 많은 무기를 획득한 곳이다. 광주의 시민군이 무장하고 공수부대에 맞설 기회를 만들어줬다. 시민들은 빵과 음료, 김밥 등을 시위대에 건네며 힘을 불어넣었다.
광주와 화순의 경계를 이루는 너릿재에서는 계엄군의 총격으로 시민이 사망했다. 화순광업소는 시민군의 든든한 뒷배가 된 다이너마이트를 제공했다.
영암읍 사거리에선 지역청년들이 시위대를 돕기 위한 성금을 모금하고 머리띠, 각목 등 시위용품을 만들었다. 박재택 등 신북지역 학생과 청년들은 도포 상리저수지 앞 도로에서 예비군 중대장으로부터 획득한 2만5000여 발의 실탄을 갖고 와 시민군 차량에 나눠 실어줬다.
해남군청 앞 광장은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와 군민이 한데 모여 신군부의 내란을 성토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버스를 탄 시위대는 해남경찰서와 완도경찰서에서 총기류를 획득했다.
![]() 이돈삼
전남5·18역사해설사, 전라남도 대변인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