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판 바조 훈계충?
특별기고

평판 바조 훈계충?

김요수 광주연합기술지주 대표

김요수 광주연합기술지주 대표
제목이 무슨 벌레 같다. 사람들은 벌레 보면 화들짝 놀란다. 벌레 싫어하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벌레 같은 말을 남들 아프게 내뱉는다. 제 몫을 사는 벌레에게는 미안한 표현이다.

평가는 기준을 놓고 따진다. ‘이건 아닌데’, 평가자의 기준일 뿐이다. 노래하는 서태지가 처음 나왔을 때 낮은 평가를 받았다. ‘뭔데 나를 평가해?’ 내 길을 갈고 닦으면 행복이 찾아온다. 알량한 지식으로 평가하기보다 기회를 줘야 한다.

판단은 값어치를 결정한다. ‘좋은 대학 가야지’, 값어치를 돈과 출세에만 둔 건 아닐까? 보잘것없는 판단이 진흙탕 싸움과 아귀다툼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

대한독립을 막고 친일에 쓴 지식은 나라를 없애는 판단이고, 내란과 전쟁 선동에 쓴 배움은 나라를 죽이는 판단이다. 제 배 채우는 판단보다 용기를 줘야 맞다.

배웠다고 우쭐거리는 평가로는 이웃을 보듬어 키울 수 없고, 살아봤다며 나이 들이대는 판단으로는 앞으로 살아갈 날을 보지 못한다. 하느님도 아니면서 ‘보기에 좋았더라’며 으스대는 평가와 선후배 따지며 ‘내 팔뚝 굵다’고 뽐내는 판단으로 인물을 알아볼 수 없다.

바른말은 이치에 딱 맞는 말이다. 하지만 배고픔 앞에서 철학을 따지기 힘들고, 총칼 앞에서 두려움을 떨치기 어렵다. 의사는 진료실을 나오면 역할이 끝나지만, 환자는 진료실을 나와도 아프다. 법조인은 법정에서 나오면 역할이 끝나지만, 범죄를 당한 사람은 판결이 끝나도 아픔을 담고 평생을 산다.

조언은 도움 주는 말이다. ‘탄수화물 줄여!’, 제가끔의 환경을 무시하고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막무가내로 끼워 맞출 수는 없다.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기준이 ‘나’가 아니라 ‘너’여야 한다. 처지에 알맞게 스스로 찾도록 도와야 한다.

바른말이 정의처럼 들려도 실행하기 어렵고, 조언이 지름길 같지만 성공으로 이끌기 힘들다. 바른말이 옳지만 돌려 까기 당하면 찝찝하고, 조언이 길을 터 줄 것 같지만 도리어 어지럽힐 때 많다. 바른말과 조언의 핑계는 ‘그때는 옳았고, 지금은 틀려’다.

훈계는 잘 하도록 타이르는 일이다. ‘그러면 안 돼!’, 높은 자리에서 잘잘못만 따지다가 때를 놓친다. 정작 할 줄도 모르면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며 초 치는 놈들 꼭 있다. 아는 척 훈계‘질’이나 하는 놈들은 온힘을 다하는 사람들 힘만 뺀다. 더 듣도록 만나게 해주고, 더 보도록 알려줘야 한다.

계몽은 모르는 일을 깨우치게 한다. 계몽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가르치려들지만, 계몽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다. 그의 상황에서 해결책이 나오지, 내 상황에서 해결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오른쪽 길이 없는데 우측통행을 밀어붙일 수 없고, 계엄으로 계몽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태어난 이승만은, 대통령이 제 맘대로 하는 임금인 줄 알아서, 4·19혁명(사실은 이승만독재 학생항거운동)의 뜻을 알지 못했다. 손바닥에 왕자를 쓰고, 대통령이 제멋대로 하는 왕인 줄 착각한 사람도 있다.

높은 사람만 착각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 윗자리에 있으면서 더 슬기롭다고 착각한 놈들 많다. 또 다른 이승만, 또 다른 손바닥왕자가 곳곳에 깔려 있다는 말이다.

충고는 잘못이나 허물을 타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을 고치라니까’, 대놓고 찌른다고 고쳐지나? 오히려 대들 때 많다. 잘못된 말과 행동이 어떤 피해를 입히는지 스스로 느껴야 한다. 물어서 깨닫게 하고, 대답으로 잘못을 인정하게 해야 맞다.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지만.

아무리 평판 바조 훈계충을 하더라도 따르는 사람? 드물다. 정말 무서운 벌레는 평판 바조 훈계충 하도록 내버려두는 일이다. ‘이 남자가 내 남자다(파리의 여인)’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높은 자리에서 뒷짐 지고 어슬렁거리는 덩치 큰 여우가 득시글거린다. 밀림의 왕자인 줄 알고! 그래도 마음과 몸으로 살아내는 김장하 어른이 계셔서, 배우며 살맛도 찾는다. 사람들이 나를 벌레 보듯 놀라지 않게 평판 바조 훈계충 하지 않도록 애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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