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파리올림픽 메달리스트 임애지가 인터뷰를 마친 뒤 메달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태규 기자 |
▲한국 복싱 12년 만의 올림픽 메달이자 여자 복싱 최초의 올림픽 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4년 전 도쿄 올림픽 이후 두 번째 출전한 올림픽 무대였는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참가했나.
=도쿄 올림픽 때는 큰 대회에 출전하는 거 자체만으로 큰 경험이고 영광스러운 마음뿐이었다. 파리 올림픽에서는 정말 후회 없는 경기를 치르고 싶었고 내가 무조건 메달을 딸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평소에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곤 한다. 올림픽에 나서기 전 몸 상태가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금메달을 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럼에도 내가 가진 모든 기량을 끌어내 한국 복싱의 위상을 올리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다. 목표를 이루고 돌아와 기쁘다.
▲올림픽을 치르며 고비였던 순간은.
=파리 올림픽까지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몸이 따라와 주지 않아 하루하루 고비였던 것 같다. 내가 스텝을 많이 뛰는 선수기 때문에 부상이 없을 수는 없다. 아킬레스건과 양쪽 십자인대, 햄스트링 부상이 있었다. 어깨도 좋지 않았고 파리 올림픽 사전캠프까지 이 상태였다. 올림픽을 앞두고 김호상 감독님으로 바뀌면서 훈련 방식이 새롭게 바뀌었다. 훈련 중 복싱은 20%, 뛰는 게 80%였다.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는 등 중량을 높여 고강도 훈련을 했는데 부상으로 인해 훈련을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지금 내가 왜 잘 안되고 나의 강점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온전한 컨디션을 만들 수 있을지 수차례 고민했다. 준비 기간 퍼포먼스 자체가 나오지 않아서 많이 울기도 했다. 이런 고비들이 성장 동력이 된 것 같다.
▲도쿄 올림픽과 현재와 비교해서 개인적으로 발전한 부분은.
=실패도 해보고 극복하는 과정도 배우면서 대회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한층 성장했다. 도쿄 올림픽을 돌이켜보면 출전하는 데만 의의를 뒀는데 주변에서 기대를 많이 했다. 그래서인지 긴장도 많이 하고 부담감을 느끼면서 올림픽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는 ‘올림픽이란 축제를 즐기고 오자’라는 생각과 함께 ‘메달을 따겠다’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했다. 확실히 복싱 자체를 즐긴 이번은 달랐다. 마인드컨트롤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 2번째 올림픽 무대를 통해 경험을 축적했고, 향후 치러질 대회도 잘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
▲메달을 확정 짓는 순간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동메달 확보가 됐을 때 기쁜 마음 보다는 ‘금을 따야겠다’라는 욕심이 들었다. 결승 진출을 노렸지만 판정패해서 정말 아쉬웠다. 이번 대회를 통해서 나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다. 나는 어떤 일을 하든 재미와 목표 의식이 있어야 열과 성을 다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동메달을 땄으니 4년 뒤 LA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생겼다. 2년 뒤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과 4년 뒤 LA 올림픽을 열심히 준비할 생각이다.
▲올림픽 치르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시합 전 몸무게를 재는 날 체중이 많이 나가서 공복에 운동해야 했었다. 안 먹고 운동을 해야지만 54㎏이 될 수 있었다. 훈련 도중 정말 배고파서 선생님께 음식 부스에 다녀와도 되냐고 여쭤봤다. 뭘 먹고 오겠냐고 물어봐서 초코바를 먹겠다고 했더니 안 된다더라. 그래서 너무 배고파서 힘이 안 난다고 이야기했다. 선생님이 (음식 부스에) 보내주고 싶지만 ‘끝나고 먹으면 더 맛있을 거다’라고 이야기했다. 결국 끝나고 간식을 먹었다. 전날 조금만 먹었으면 이날 공복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됐었는데 후회되면서도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웃음). 냉장고에 음식을 넣어놨는데 못 먹고 눈으로만 보기도 했다. 체중을 빼고 다시 늘릴 때 마음 놓고 먹고, 배가 불러도 보상심리로 먹게 된다.
▲평소 멘털관리는 어떻게 하나.
=책을 많이 읽는다. 책을 읽고 블로그에서 독후감을 쓴다. 처음에는 책 내용을 기억하기 위해서 쓰기 시작했는데 글쓰는 데 재미를 붙였다. 나는 책을 읽고 난 뒤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을 독후감 제목으로 적고, 누군가 그 책의 내용을 물었을 때 바로 떠올릴 수 있게끔 한 문장으로 기억한다. ‘타이탄의 도구들’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서 ‘버티는 사람이 이긴다’라는 문구가 있다. 이 책 역시 문장으로 기억했다. 멘탈이 무너질 때, 힘든 시기를 보낼 때 내가 블로그에 썼던 글을 본다. 책을 읽었을 때 느꼈던 감정들과 기억들을 되새긴다. (그러다 보면)어느 순간 내가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글을 쓰다 보니 말하는 것도 전보다 좋아졌다.
▲임애지 선수의 요구로 전국체전에서 여고부 체급 세분화가 내년 전국체전부터 추진하게 됐다. 일반부는 올해 말 이사회를 거쳐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성사돼 국내 여자복싱 체급에 변화가 생긴다면 임애지 선수로 인해 한국 복싱의 국제 경쟁력을 늘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체급 세분화가 이뤄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여자복싱은 국내 대회와 국제 대회의 체급이 다르다. 전국체전에서는 체급이 3개 밖에 없는데 대학생 때부터 전국체전 체급 세분화가 된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희망을 품고 복싱을 해왔는데 올해도 생기지 않으면서 또다시 증량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나는 국내에서 60㎏급을, 국외에선 54㎏급을 뛴다. 누군가 나에게 몇 ㎏급을 뛰냐고 물었을 때 혼란이 오기도 한다. 경기 출전을 위해 살을 찌고 빼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호르몬에도 문제가 생겼다. 선수들도 ‘이렇게까지 체중 조절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경쟁력을 갖춘 선수들이 많은데 체급 세분화가 이뤄지지 않아 기회를 받지 못하고 있다. 선수들의 건강은 물론 종목 발전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체급 세분화가 필요하다.
▲최근 키즈 복싱 바람도 불고 여성 동호인도 늘면서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올림픽에서 선전한 임애지 선수의 효과인 것 같다.
=복싱이 접근성이 정말 좋아졌다. 취미로 하거나 리듬 복싱처럼 다이어트 운동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적인 종목이 됐다. 올림픽 이후에도 복싱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개인적으로 기쁘다. 일상생활을 하다가 복싱처럼 땀 흘리는 운동을 하면 개운하고 해낸 것 같다는 성취감이 든다. 샌드백 타격할 때 스트레스를 풀린다는 사람도 많다.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복싱을 했으면 좋겠다.
▲복싱을 처음 시작하게 된 시기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복싱을 접했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복싱 선수를 하게 됐다. 학교에 복싱부가 없어 다니던 체육관에서 운동했다. 당시 부모님이 ‘선수 할 거냐’며 반대를 하셨는데 힘들게 허락받아서 엄마에게 그날 배운 동작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때 복싱을 계속 배워야 할 이유를 만들고 시작하게 됐다. 이후 선수 시작 1년 만에 지역 대회에서 우승했고 더 욕심이 생겼다.
▲선수 생활에서 가장 큰 도움이 됐던 멘토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다. 칭찬을 받으면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에 칭찬받는 걸 좋아한다. 취미로 복싱을 했을 땐 주변에서 칭찬을 많이 들었다. 선수 되고 나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칭찬받고 싶어 하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당시 화순군청 박지선 코치님께서 ‘너한테 아무 말도 안 하는 건 네가 잘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게 기억이 남는다. 묵묵히 옆에서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다. 10년 전인데 생각이 났다.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나.
=‘시합을 온전히 즐기는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열심히 하거나 잘하는 선수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다. 대회든 운동이든 즐기면서 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 스포츠는 공정한 무대에서 규칙을 가지고 서로 경쟁하는 싸움이다. 좌절할 때도 있지만 때론 기뻐하며 스포츠를 즐기고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한다. 관중들은 경기를 보면서 경기 내용에, 선수들의 노력에 감정이입을 한다. 그렇게 스포츠는 모두가 즐기는 축제가 된다. 복싱이 아닌 다른 종목 선수들도 그렇게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
▲임애지 선수를 롤모델로 삼아 복싱 국가대표를 꿈꾸는 유망주 선수들에게 조언해주고 싶은 점이 있다면.
=평소 훈련은 열심히 하되, 시합 때만 즐기면서 해야 한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세계선수권 나가서 금메달을 딴 적이 있다. 다음 메달이 파리 올림픽에서 딴 동메달이다. 7년간의 공백이 있었다. 어린 친구들은 ‘임애지 선수처럼 돼야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공백기 동안 그만두고 싶었던 순간들도 있었다. 어떤 상황이든 부딪혀보고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국 잘하는 게 승자가 아니라 ‘버티는 게 승자다’라는 말을 하고 싶다.
▲끝으로 열띤 응원을 해주신 팬분들께 한마디
=파리 올림픽 경기가 한국시간으로 늦은 새벽에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켜봐 주신 분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화순 시민들을 비롯해 나를 응원해주고 격려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몬스타엑스 멤버들과 사이먼 도미닉 선수도 SNS로 나를 응원했다. 내가 올림픽에서 느꼈던 감정과 사람들이 느낀 올림픽 정신이 교류돼 벅차올랐다. 4년 뒤 LA 올림픽에서는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조혜원 기자
![]() 2024 파리올림픽 메달리스트 임애지가 인터뷰를 마친 뒤 메달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태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