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매광장>오겡끼데스카
조세핀 시인·광주전남작가회의 회원


얼마 전, 광주는 마치 설국 같았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은 유난히 많은 눈이 내려 티끌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연일 내리는 눈을 보며 나는 환호했다. 이동하는 사람들은 불편하겠지만, 눈이 주는 기쁨은 그 이상일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는 날이면 세상 사람들이 하루쯤 하는 일을 멈추면 어떨까. 다함께 눈만 바라보며 하루를 보내도 좋을 것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커피를 들고 밖을 내다봤다. 유리창으로 몰아치는 눈발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서 나오라고.

끝없이 펼쳐지는 설원 영화

일과를 조깅으로 시작하는 나는 겨울이 되면 움츠러든다. 루틴이 된 일상이지만 요즘 같은 날씨에는 도저히 이른 아침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머뭇거리고 있는 나를 눈이 불러낸 것이다. 못이긴 척 두툼한 파카와 가죽장갑을 끼고 털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대학 캠퍼스로 향했다. 한겨울에도 얼.죽.코(얼어 죽어도 코트)를 추구하는 나로서는 아쉬운 차림이지만 그렇다한들 분위기만 잡고 가기에는 눈발이 거셌다. 할 수 없이 우산까지 펼쳐들었다. 거리에는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았다. 신호등만 저 혼자 깜빡거렸다. 나는 길을 건너다 말고 우두커니 도로 한 가운데 서 보았다. 물론 오가는 차가 없었으니 가능한 일이지만 순간 엉뚱한 상상을 했다.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 행복했다.

끝없이 펼쳐지는 설원을 배경으로 하는 두 영화가 생각났다. 한국에서도 재개봉이 여러 번 될 정도로 사랑받았던 러브레터. 일본 북해도의 아름다운 설원에서 울러 퍼지는 오겡끼데스카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던 사람들도 다 알만한 명대사이다. 지금도 어느 설원에서 누군가 손나팔을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오겡끼데스카. 또 동서를 막론한 세기의 명화, 닥터 지바고가 있다. 시인이자 의사인 유리와 라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로 오마 샤리프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영화이다. 각본상, 촬영상, 미술상, 음악상, 의상상까지 무려 다섯 개 부문을 석권했으니 그 감동은 보지 않고는 설명이 어렵다. 특히 눈 덮인 자작나무를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주제곡 라라의 테마는 눈길을 걷고 있는 지금도 흥얼거릴 정도이다.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겨지는 뒤를 가끔 돌아보며 혼자서 러시아 자작나무 숲으로 갔다가 북해도의 산등성이로 갔다가를 반복하는 사이 어느새 커다란 트랙을 두 바퀴나 돌았다. 한 시간 남짓 걸었으니 아무리 무장을 했다 해도 추웠다. 덩그러니 혼자 놓여 있다고 생각하니 냉기가 몰려왔다. 이제는 돌아가야겠다 싶어 입구를 향해 가고 있는데 저 멀리 운동장 한 가운데 서 있는 남녀가 보였다. 길을 잃은 것도 아닌데 이정표가 되어 준 그들이 반가웠다. 그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다가갔다. 사진을 찍어드릴까요. 했더니 괜찮다면서 볼과 콧등이 빨간 여학생이 찍어드릴까요 되묻는다. 설경 속 주인공을 마다할 리 없는 나는 기꺼이 응했다. 손이 얼어 터치도 잘 되지 않았을 텐데 성심껏 찍어 준 라라(?) 덕분에 흡족한 사진을 건졌다.

편안한 설 명절 맞았으면

동동거리며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보면서 오늘의 여러 위기상황을 모두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해가 바뀌었다고 하루아침에 큰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작년보다 올해가 더 나아지고, 또 올해보다 내년이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는 한 마음일 것이다. 요즘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지갑을 닫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경제상황은 서민들의 가벼워지는 장바구니가 바로미터가 아닌가 싶다. 며칠 있으면 설이다. 설 명절날만큼은 서로의 안녕을 편안하게 물어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내일의 태양은 내일 다시 떠오른다고 했으니 오늘은 설경이 아름다운 영화를 보면서 서로에게 위로를 건넸으면 한다. 잘 지내시죠?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