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가 경칩이었다. 겨울잠 자는 개구리도 일어난다는 경칩, 우수와 더불어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돕고 농부들은 본격적으로 농사를 준비하는 중요한 절기이다. 이쯤이면 삼라만상이 모두 깨어난다고 한다. 봄비까지 촉촉하게 내리는 날에는 서둘러 물러가는 겨울의 발뒤꿈치가 보이는 듯도 하다. 그렇게 긴 겨울을 물리치고 봄이 왔다. 봄은 걷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특히 봄비가 갠 후 뽀송해진 길은 걷는 이들에게 소소하지만 커다란 행복이다. 겨울 동안 이래저래 핑계 대며 아침산책을 소홀히 했던 나도 그동안 걷지 못했던 것을 보상이라도 받고 싶었는지 부드러워진 바람 따라 틈만 나면 걷고 있다. 낯선 길을 걷는 것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나름의 재미가 있을 것이다마는 내가 걷는 장소는 정해져 있다.

서울 양재천에 가면 칸트 산책로가 있다. 철학자 칸트는 늘 같은 시간에 본인이 살고 있는 동네를 산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칸트가 걷고 있으면 몇 시가 되었구나하고 알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산책 습관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은 낯선 길보다 날마다 같은 길을 걷는 것이 사색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낯선 길을 걷다보면 새로운 것에 시선을 빼앗겨 내면의 소리를 듣기 쉽지 않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는 어떤 곳이든 걷는 것이 좋다. 철학자가 아니어도 예술가가 아니어도 자신과 깊은 대화를 하고 싶다면 되도록 같은 길을 반복해 걷기를 추천한다. 누구라도 그 순간은 오롯이 철학자가 되고 예술가가 될 것이니 말이다.

내가 주로 걷는 곳은 집 근처 대학 캠퍼스이다. 그곳은 어느 곳보다 먼저 사계를 느낄 수 있어 좋다. 변화무쌍한 사계의 신묘함을 누구보다 먼저 선물 받은 기분이다. 그렇게 수년을 아니 십년이 훌쩍 넘게 걷고 있음에도 오늘에야 발견한 것이 있다. 다름 아닌 이끼다. 그동안 이끼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아니다. 작년 가을에도 초록의 이끼가 융단처럼 깔아진 곳을 맨발로 걸었었다. 이끼가 뭐 대수라고 새로운 발견 운운한 것이 너무 호들갑스럽다고 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글쎄 이 찬란한 봄을 가장 먼저 데리고 온 자가 바로 이끼라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으니 말이다. 흙이 있는 곳이면 황금들판처럼 펼쳐져 있는가 하면 파스텔 물감을 엎어놓은 듯한 이끼는 마치 초록바다에 떠 있는 해초 같기도 하다. 아직 겨울을 붙들고 있는 키 작은 대나무의 갈색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끼다. 어디 바닥뿐인가. 아름드리나무는 물론이고 몸통이 그리 두툼하지 않은 나무들도 초록으로 더러는 연두로 또 더러는 황갈색으로 듬성듬성 나무의 허리를 휘감고 있다. 이끼의 이런 활약을 발견하고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봄에 태어난 나는 이즈음이면 늘 봄 앓이를 하곤 한다. 그런데 어느 해부턴가 그 증상이 조금씩 약해졌다. 틈만 나면 걷고 뛰는 것이 도움이 되었지 싶다. 몸은 출렁거려도 마음의 출렁거리는 온도가 달라졌으니 말이다. 이끼의 무던함과 온화함을 닮은 듯 편안해졌다. 더디게 오는 것처럼 느껴졌던 봄과 함께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서울 대학가 주변의 월세가 점점 올라가고 있다. 지방에 있는 부모들의 부담이 이만저만 아니다. 두 딸을 서울로 보낸 나로써도 이맘때쯤이면 월세 방을 재계약하거나 다시 구하는 일로 분주하다. 정부에서도 청년들을 위한 대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 수혜를 받는 사람들은 극히 제한적이다.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물가에 아이들 주거 문제까지 고충이 더해가고 있다. 그 가운데 이끼는 봄을 데려왔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봄을.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발 아래 있다고 했다. 아직 봄의 전령사 이끼의 늠름함을 보지 못했다면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살펴보시라. 이끼 위에 잔뜩 얹혀 있는 봄에 취하고 말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