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 스틸컷

정순 스틸컷3

정순 스틸컷3

정순 포스터2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23회 전주국제영화제(2022)에서였다. 같은 해 광주독립영화제 준비를 위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독립영화들을 열심히 찾아보던 중 한국장편경쟁부문 경쟁작 중 하나인 영화‘정순’을 보게 된 것이다. 아무런 정보 없이 본 영화는 나에게 디지털 범죄 사건의 또 다른 문제 제기로 다가왔으며 영화‘정순’은 그해 11회 광주독립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됐다.

“엄마요? 아…. 그럼 엄마가 영상에 몰래 찍혔다?” 이제 곧 시집갈 딸을 둔 정순은 야간에 식품 공장에서 일하는 순박한 ‘중년 여성’이다. 공장과 집만을 오가며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정순은 공장에 새로 들어온 영수와 가까워지게 되고 둘은 중년의 사랑을 하게 된다. 일이 끝나면 매일 영수가 지내고 있는 모텔에 있다가 오곤 하는 정순. 어느 날 영수는 속옷 차림의 정순에게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대고 기겁한 정순은 찍지 못하게 말린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인 영수를 위해 딱 한번 허락한 동영상 촬영이 정순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 놓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순의 동영상은 일파만파 퍼지고 정순은 자신을 보고 숙덕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삶을 놓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하지만 정숙의 곁엔 살갑지는 않지만 누구보다 엄마를 믿고 단단히 그 곁을 지켜주는 딸 유진이 있다. 엄마를 대신해 경찰서에 신고를 하면서도 결혼을 앞둔 지금 엄마를 원망할 수도 있음에도 엄마를 책망하지 않는다. “내 일이잖아. 왜 니가 다 알아서 해?” 그러나 정순은 딸에게 미안하고 고통스러워 스스로 이 사태를 벗어나 보려 한다. 사과하겠다며 찾아온 영수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 “이렇게 일이 커질 줄 몰랐어. 당신이나 나나 잘 견뎌야지. 우리 둘 다 벌어 먹고살아야지. 사람들도 잠깐 이러고 말 거야.” 결국 그들을 선처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활개 치고 다니는 가해자들. 왜 피해자인 정순이 숨죽여 살아야 하는가. 정순은 그날 당당히 공장으로 찾아가 그들을 응징한다.

영화는 일련의 디지털 성범죄가 젊은 여성, 젊은 남성에게만 국한돼 있다는 식의 편견을 뒤집는다. 중년 여성, 중년 남성에게도 디지털 성범죄는 있을 수 있는 사건이며 분명 어디에서는 일어나고 있음을 피해자 정순과 가해자 영수를 통해 보여준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디지털 성범죄 중 가해자가 중년 남성인 경우도 다반사라고는 하지만 젊은 여성들도 쉽게 신고하지 못하는 사회 인식 속에 중년 여성이 피해자인 경우는 어떠할까.

영화는 이모와 삼촌으로만 호명되는 공장 안에서 젊은 작업반장의 정순과 영수를 대하는 말투와 행동 등을 통해 공장이라는 폐쇄적인 공간 속에 천박한 자본주의에 잠식된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를 한 프레임 안에 둔다. 그리고 뒤바뀐 권력의 서열 관계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 일상과 함께 두 세대 간의 불통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11회 광주독립영화제 폐막작 GV(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면서 만났던 정지혜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는 동안 쑥스러워하면서도 순박하고 당찼다. 영화‘정순’은 시나리오에서부터 연출까지 정지혜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정감독은 이전 단편영화‘면도’(2017),‘매혈기’(2018),‘버티고’(2019) 등에서부터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게 주목해 왔다. 경남 양산 출신인 정감독은 고등학교 때 영화 동아리를 통해 영화를 접하게 됐으며 이후 동서대학교 영화과를 나와 지금의 장편영화‘정순’을 연출했다. 대학 시절 등록금 마련을 위해 1년여간 식품 공장에서 일한 경험으로 인해 영화‘정순’에서의 공장 생활을 리얼하게 연출할 수 있었다. 또한, 경남 양산에서 나고 자란 덕에 영화 속 모든 촬영은 경남 양산에서 촬영됐으며 촬영 동안 부모님과 주변 지인분들의 도움으로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광주독립영화제 GV 당시 정순이 직접 운전을 하고 가는 마지막 씬에서 자동차 브랜드와 핸들에 적힌 브랜드가 다르다는 질문을 받았을 때 부모님이 폐차장을 하셔서 그곳의 부속품을 짜깁기(?)한 차를 소품으로 사용했다는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도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지역인 부산과 양산을 배경으로 계속해서 영화를 찍겠다는 정감독은“영화를 보시면서 나와 또 나의 엄마, 혹은 주변에 가까운 분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시면서 영화를 봐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단편영화‘미영씨’(2020)에서 몸을 사리지 않은 연기로 지금도 나의 뇌리에 연기 잘하는 배우로 각인돼있는 정순역의 김금순 배우는 이번 영화‘정순’에서는 정순이라는 캐릭터를 위해 더욱 파격적이고 과감하면서도 정순의 감정선을 잘 표현한 감성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중년 여성의 모습 그대로를 담아내기 위해 다이어트도 포기한 채 살찌워진 몸으로 속옷만 입고 춤을 추는 장면 등을 연기한 그녀는 금순이 아닌 정순 그 자체였다. 이 영화로 17회 로마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며 올해 개봉한 독립영화‘울산의 별’(2024)로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수상했다. 영화‘브로커’,‘비상선언’,‘잠’, 드라마‘카지노’등에서 조연 또는 단역을 하며 우리에게 얼굴을 알리는 중인 김금순 배우. 5월에 방영되는 드라마‘히어로는 아닙니다만’(JTBC), 영화‘야당’등을 통해 올해에도 종횡무진 활약하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화‘정순’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어났던 N번방 사건 등 디지털 성범죄에 관해 경종을 울리면서 피해자가 젊은 세대만이 아닌 중년 세대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중년 여성 정순을 통해 환기시킨다. 그리고 영화는 정순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라는 틀 안에 갇히지 않기를 바란다. 사건 이후 공장에 다시 나가 자신의 떳떳함을 입증이라도 하듯 분노하고 서툴지만 혼자서 운전하는 엔딩씬을 통해 자신의 삶을 찾아 나아가는 중년 여성의 모습을 담아내며 정순이 더이상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아닌‘정순’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맞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사회의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각성과 더불어 피해자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거듭나는 중년 여성의 성장을 그린 영화‘정순’, 극장에서 꼭 보기를 추천한다.

영화‘정순’은 제70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신인 감독 경쟁’섹션 개막작 선정 등 세계 19개 영화제에 초청받아 8관왕에 올랐으며 2022년 23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대상, 17회 로마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