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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으로 가는 길도 변했다. 처음엔 강릉행 고속버스로 장평까지 가서 거기서 픽업을 받았는데 코로나 때를 지나면서 승객이 줄자 경영난을 겪던 버스노선도 축소되어 지금은 KTX로 평창까지 가서 역시 픽업을 받는다. 하지만 변한 것보다 변하지 않은 것이 더 많다. 길, 숲, 그리고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산들이 여전히 나를 반긴다.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도 늘 새로우면서도 익숙하다. 어느새 고향을 찾아가듯 정겨운 마음도 들어 발걸음이 저절로 가벼워진다.
강좌를 위해 평창을 오가던 첫해에는 길이 너무 멀어 고되게만 느껴졌다. 눈 내린 날이면 도로가 막히고, 안개 낀 날은 앞이 보이지 않아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런 길 자체가 기다려졌다. 강의실에서 만날 사람들, 그들과 나눌 이야기, 그리고 차창을 통해 길 위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경과 생각들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수필을 가르치면서 나도 배운다. 그들은 시와 소설도 같이 공부한다. 수강생들의 글엔 평창의 맑은 공기처럼 투명한 감정이 담겨 있다. 그들의 감성도 어떤 이는 첫눈에 감탄을 쏟아냈고, 어떤 이는 고향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힌다. 그들의 글은 평창의 계절처럼 다양하다. 봄처럼 부드럽게 시작해 겨울처럼 깊어진다. 그 안에서 나도 문장(文章)이라는 것이 결국 삶의 숨결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평창역에서 바라본 단풍 든 산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정겹든지 그걸 바라보고 있다가 하마트면 차를 놓칠번 했다. 그러니 그동안 시인이 되고 수필가가 되고 소설가가 된 그들에게서 고향이, 산이, 사람들의 마음들이 평창이란 이름으로 많이도 그려지고 보여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고향이 없는 사람이다. 동란 중 외가에서 태어난 나는 그곳이 고향이 되어버렸고 호적상 원적지엔 가보지도 못 했다. 그렇게 외가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한 나는 “네 피붙이 찾아가라”는 외가쪽 어른들을 피해 5년여를 백숙부모님 신세를 지게 되었고 그 후로는 나만의 삶을 살았으니 고향을 말하면 엉거주춤 해 지면서 내가 부초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사는 곳마다 쉽게 정을 붙인다. 그것도 복이라면 복일 것이다. 갈 곳도 없는데 늘 낯설어만 한다면 그 또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나는 서울 공릉동에서 7년, 수원에서 4년, 그리고 강남구 도곡동에서만 무려 40년을 살았다. 얼마 전 마지막 달팽이집인 용인으로 왔는데 이곳 또한 내겐 잘 맞다.
평창을 오가면서 느끼는 풍경도 정경도 지금까지 살아온 곳들에서 크게 다르진 않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겠지만 그래도 이만큼 머무를 수 있는 행복, 돌아올 수 있는 행복, 새롭게 만나고 헤어지기도 하는 행복, 그 모든 것이 삶 속에서 누리는 행복들 아니겠는가.
아침 8시 집을 나서서 청량리역까지 간 후 KTX로 평창까지 가는 길이 일흔을 훌쩍 넘어버린 내게는 사실 만만치는 않다. 그러나 공부하겠다는 열정이 있는 곳이요, 또 만나면 서로 그저 정답고 즐거우니 그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평창은 태백산맥과 차령산맥의 분기점으로 700m 고산지대다. 청정지역의 채소라며 그 바쁜 시간에도 쌈거리를 챙겨오는가 하면 1년 농사라며 꿀을 가져온다. 옥수수에 감자며 산나물까지도 철따라 경쟁하듯 가져오는 바람에 나는 이 나이에도 때아닌 호강을 한다. 8월 한 달은 방학으로 그 한 달 못 가면 보고싶고 그리워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게 평창은 고향처럼 다정한 곳이 되었다. 평창은 내게 길위에서, 게절 사이에서, 사람들의 이야기와 정 속에서 가고싶게 만드는 곳이 되어버렸다. 해서 오늘도 평창으로 가는 길은 즐겁다. 그들이 있고 그들이 기다리는 내가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