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한 반남고분군 |
![]() 마한반남고분군 |
![]() 마한반남고분군 |
1895년 동학과 단발령으로 나주목 위치는 사라지고 근대화와 곡창으로 아픔을 겪어 온 것도 나주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겪어 왔기에 나주는 문화도시라기보다 역사도시라 해도 될 것 같다. 그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희로애락과 우여곡절이 있었을 터다. 필자는 그 역사 속에서 이뤄졌던 나주만의 절실한 이야기를 시대별로 나눠 전해보려고 한다. 이 글은 사실(史實)과 문헌에 근거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스토리텔링이 아니라는 점 말씀을 드리고 싶다. 편집자 주
●조선총독부, 전남도에 고대유적 조사
1916년 2월 25일 조선총독부에서 전남도 도장관(현 도지사)에 공문이 전달된다. 고분 성지 급 고대유적(古墳城址及古代遺蹟)을 조사해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전남도는 4월 26일 총독부 정무총감에 조사 결과를 제출한다. 조사 결과 고분이 1)세지면 죽두리 부근 7개소 2)반남면 봉하리 부근 20여 개소 3)동강면 석천리 부근 8개소가 있다고 보고한다. 그 중 반남에 대한 내용을 보면 2월에 삼정(森井·모리이) 총독부 기사가 답사해 발견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 땅은 반남박씨 기원지로 현재 부근 토지가 박씨 후예의 소유다. 답사를 마치고 1개소를 발굴했더니 큰 옹관에는 유골이 있었으며 작은 옹관을 삽입해 그 간극을 분토로 발랐다. 묘 가운데서 부식된 칼을 발견해 반남헌병대에 보관했다. 여기 사람들은 이곳을 조산(造山)이라 부르는데 이러한 묘들이 여러 곳 있어 희귀한 지역에 속한다”고 보고한다. 1500년 잠들어 있던 반남고분을 깨우는 최초 보고라 할 수 있다.
잠을 깨우는 작업은 계속된다. 1916년 4월4일 작성된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중 ‘사적에 관한 건’ 문서철에는 1916년 3월 30일 농산공부산림과 기수 삼정삼성(森井三省)이 쓴 기록이 있다. “그 곳은 영산포에서 남서방으로 2리 반 거리에 있는데, 반남장 부근에 25개 고분이 완전한 형태로 보존돼 있다. 큰 것 아래 직경이 30간이고 높이가 3간이며 작은 것도 아래 직경이 5간에 높이가 9척이다. 부근 주민들은 이곳을 그냥 산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국유지였다. 반남면 주민들의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반남헌병출장소 입회 하에 정상 부위가 붕괴돼 내부가 노출된 한 곳을 선택해 발굴했다. 정상에서 2척 파내려 가니 커다란 항아리가 횡으로 누워 있고 서로 입이 붙어 있는데 종 모양으로 길이가 6척이고 둘레가 12척, 두께가 6촌이었다. 작은 것은 길이가 3척이고 둘레가 9척, 두께가 2촌이었는데 큰 것의 입구로 5촌 가량 삽입돼 있었다. 두 옹관 공간은 점토로 발라 침수를 막았던 것으로 보였다.”
![]() 마한반남고분군 |
![]() 금동관 |
![]() 신촌리 9호분 옹관 |
1916년까지 조사된 각 도의 석기, 고분, 성지 등 총 15개 항목에 대해 조사 정리한 ‘조선유적유물지연구(朝鮮遺蹟遺物之硏究)’ 문서철에도 반남면 고분 명칭은 조산(造山)이고 수량은 25기라면서 대략 다음과 같이 기재돼 있다. ‘1916년 3월 삼정삼성(森井三省)씨가 그 중 1기를 발굴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흙산 높이는 6,7척인데 그 정상에서 2척 가량에 외부는 회색이고 내부는 청색인 옹관이 있습니다. 옹관 2개를 접합했는데 접합부는 흙을 발라 막았습니다. 동쪽에 있는 옹관은 6척이고 서쪽 옹관은 3척입니다. 동쪽 것은 방대형이고 두께는 6촌 가량입니다. 조선인 3인이 위에 올라도 이상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옹관의 상부 표면에는 마(麻)와 같은 포목의 흔적이 있고 동쪽 옹관에는 인골이 있었고 옆에는 붉고 푸른 칼이 있는데 길이가 3척이었습니다.“(하략)
조선총독부는 1916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고적조사사업(古蹟調査事業)’을 본격 실시한다. 제2회 고적조사위원회는 나주 반남면 고분 10기를 1916년 8월부터 1917년 3월까지 조사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반남고분군 조사는 1917년 이뤄지게 되는데 곡정제일(谷井濟一)을 대장으로 소천경길(小川敬吉), 소장항길(小場恒吉), 야수건(野守健) 등 4명이 참여한다. 이들은 1917년 12월17~26일까지 덕산리 4호분과 신촌리 9호분을 발굴 조사한다. 이 조사과정을 기록한 문서가 있으니 바로 소천경길(오가와 게이키치)이 작성한 신촌리 9호분 ‘발굴조사일지’다. 이 신촌리 9호분 발굴일지는 당시에는 발표되지 않았다가 1950년 그가 사망한 후 경도대학(京都大學)에 기증한 유품을 조사 정리한 조선고고학 담당자 유광교일(아리미쓰 교이치)에 의해 1980년 학계에 소개되면서 알려진다.
내용을 보면 △‘1917년 12월 17일(월요일) 나주군청을 방문하고 반남면에 가는 도중 풍설이 강하고 도로가 나빠 우회해서 해질녁 반남면사무소에 도착하다. 생각 밖에 한촌(寒村)으로 숙소를 얻지 못해 면사무소에 여장을 풀었다. △12월 20일(목) 신촌리 9호분의 발굴을 시작함. 남쪽 이도로 생각되는 쪽부터 착수, 오후는 변경해 봉토중앙부부터 발굴함. 60~90㎝ 하에서 옹관이 가로 놓임을 발견함. 2개 옹관 아가리를 접하고 점토로 빈틈을 막은 것, 옹관의 한 쪽을 뺑 둘러 대소 7개 단지를 부장(副葬)하였음. 그 중 6개의 단지는 옹관 파편으로 뚜껑을 삼았다. 다음에 이것을 을옹관(乙甕棺)이라 명명했음. 이 때 해가 저물어 야경꾼을 두고 돌아 옴. △‘12월 23일(일) 소장항길(오바 쓰네키치) 씨 도움을 얻어 우선 갑 옹관을 개봉함. 단지, 철촉, 손칼(刀子) 및 소옥 등을 수습함. 다음 을 옹관의 깨진 부분을 이용해 개관(開棺)함. 유해는 재가 됐고 두부에 금동관, 좌측에 대도, 창, 촉 등을 두고 목과 팔부분에 각종의 옥류가 산재했음. 족부(足部)에는 소옥 및 금동신발이 있음. 금동관과 금동신발의 모습이 나타나는 역사적인 장면을 기록했던 것.
●옹관 개봉하니 금동관·금동신발·칼·소옥 등 수북
조사단은 1918년 1월 제출한 조사 복명서는 1920년 3월 31일 ‘大正六年度 朝鮮古蹟調査報告’라는 책으로 발간 하게 되는데 그 내용에 유물이 왜(倭)의 것이라는 추정을 내놓는다.
지금 조사 결과를 개설하면 지반 위에 성토하고 그 위에 도제 대형옹관을 옆으로 누인 다음 그 안에 성장한 시신을 지금까지 반도 내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베로 감싼 시신을 판에 올려 머리부터 대옹 안으로 밀어 넣고 깨친 도편으로 옹관을 고정시키고 약간 작은 토기 옹을 이용하여 피장자의 다리를 막는다. 대소 옹의 접합부는 점토로 밀봉하고 옹관 밖 다리 부분에는 토기를 놓고 흙으로 덮었다. 발견 유물은 금동관, 금동신발, 큰칼, 도자, 도끼, 창, 화살, 톱, 귀걸이, 곡옥, 관옥, 절자옥, 소옥 등으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고분들은 그 장법과 관계 유물로 추측하건 대 아마도 왜인(倭人)일 것이다.
1918년 3월 30일 ‘조선시보(일본어판)’신문에 ‘羅州古墳調査, 千七百年間の遺骨’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는데 내용 중 왜인의 도래설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 때 발굴된 유물은 조사를 마친 12월 26일 수레에 실려 나주로 옮겼다가 열차 편으로 서울로 가져갔다. 수 십 수레였다고 전해 오는데 6,7대는 나주로 가지 않고 영암 남해포로 가서 배편으로 일본으로 갔다는 현지 노인들의 증언을 수집할 수 있다. 유물은 당시 촬영한 ‘유리건판 사진’과 ‘1917년 추기 수집품 목록’을 통해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조사를 마친 곡정 위원은 반남고분에 대한 추가조사를 하기 위해 대정7년 고적조사계획에 포함을 시켜 1918년 10월 16일부터 11월 3일까지 신촌리 9호분과 덕산리 1호분, 대안리 8호, 9호분을 발굴하게 된다.
1917~18년 발굴한 덕산리 4호분과 신촌리 9호분, 대안리 8, 9호분 등 발굴 수집품 목록은 곡정제일(谷井濟一) 위원의 조사수집품 목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신촌리 9호분이 가장 많았고 대안리 9호분 유물이 뒤를 이었다.
●불법도굴·밀거래 성행에 보존규칙 제정·공포
1916년 ‘고적조사사업’이 본격 시작되고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되자 일본인 약탈자들의 불법 고분도굴과 위법 밀거래가 성행을 하게 된다. 이에 총독부는 “조선총독부에 별기 양식의 고적 및 유물대장을 갖추고 고적 및 유물로 중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해 다음의 사항을 조사해 이를 등록한다”고 규정한 보존규칙을 제정 공포하게 된다. 이에 따라 반남고분군도 1920년 6월3일 등록을 하게 된다. 제414호 나주덕산리 1호분 나주군 반남면, 제415호 나주덕산리 4호분 동군 동소, 제416호 나주신촌리 9호분 동군 동소, 제417호 나주대안리 8호분 동군 동소, 제418호 나주대안리 9호분 동군 동소이후 조선총독부는 보존규칙을 더 강화하기 위해 1933년 8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과 ‘조선총독부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관제’를 제정하게 됨에 따라 1939년 10월 18일 고적 제110호 나주대안리고분군, 고적 제111호 나주신촌리고분군, 고적 제112호 나주덕산리고분군으로 지정을 받게 된다.
이후 반남고분군 도굴이 심해지고 유적 괴멸을 염려해 1938년 고적보존회의 3차 고적조사사업을 발주, 1938년 5월18~28일 덕산리 2호, 3호, 5호분과 신촌리 6호, 7호분, 흥덕리 석실분을 발굴 조사했다. 여기까지가 일제강점기 반남고분군에 대한 역사적 발굴 기록이다.
해방 후 1955년 6월 28일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가 발족돼 문화재를 관리하게 됐으며 1962년 1월10일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1963년 1월21일 문교부고시 제174호로 사적 제76호 나주대안리고분군, 사적 제77호 나주신촌리고분군, 사적 제78호 나주덕산리고분군으로 사적(史蹟) 지정을 받으면서 국가지정 문화재가 됐다.
문화재청은 문화재 역사성과 특성 등을 고려, 인접지역 고분군과 도요지 등을 통합해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문화재 광역적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2011년 7월28일 세 개로 나눠져 있는 반남고분군을 통합해 사적 제513호 ‘나주 반남고분군’으로 재지정을 하게 된다. 유물 중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만이 1997년 9월22일 국보 제295호로 지정됐다가 2022년부터 국보 번호를 부여하지 않고 명칭만 사용하기로 하면서 ‘국보 나주 신촌리 금동관’으로 부르게 됐다. .
![]() 신촌리 9호분 옹관 |
지금도 나주시 반남면에는 ‘마한반남유적보존회’가 활동 중이다. 1976년 김일석씨 주도 하에 ‘백제고총보존회’가 설립되면서 활동을 시작해 1977년 반남번영회의 지원을 받아 ‘반남고분유적보존회’, 1984년에 (사)반남유적보존위원회로 재창립 해 1988년 ‘나주 반남고분군 종합조사보고서’ 간행 작업에 참여 하면서 12월 나주 군민회관에서 문화강좌와 유물 사진전시회를 개최했다. 2020년 7월 ‘반남마한유적보존회’로 명칭을 바꿔 현재까지 활동을 하고 있다.
21세기가 되면서 국가에서는 마한 역사적 사실을 보존 계승하기 위해 국립박물관 설립계획을 세우게 되고 2007년 1월 반남면으로 부지를 확정하고 ‘국립나주박물관’ 건립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2008년까지 건축설계 공모를 거치고 74,272㎡(22.467평) 대지 위에 2010년 12월 15일 기공해 2013년 8월30일 개관해 유적지에 설립한 최초 국립박물관으로 출범해 많은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나주시는 나주역 2층 대합실에 실물 그대로 복각한 ‘국보 금동관’과 ‘보물 금동신발’을 전시해 나주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마한의 보물을 선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