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나주문화원 향토문화회관에 세워져 있는 절부비. |
![]() 나주문화원으로 이전하기 전 절부비 |
●세조, 나주 한림 조탁의 처 나주 나씨에 절부 표창
‘세종실록’ 제7권 1420년(세종 2·영락 18년) 1월 21일 기록이다. ‘임금이 처음 즉위하여 중외에 교서를 내리어 효자·절부(節婦)·의부(義夫)·순손(順孫)이 있는 곳을 찾아 실적(實迹)으로 아뢰라고 했더니 무릇 수백 인이 되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그 중에 특행(特行)이 있는 자를 추리라”고 정초를 명해 예조에 올린 행장 기록을 가지고 좌·우의정과 의논한 결과 41인이었다. (중략). 광주(光州) 별장(別將) 홍전(洪琠)의 처 박씨는 나이 30세에 지아비가 죽으매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겼는데 나이 이미 51세다. 나주(羅州) 한림(翰林) 조탁(趙琢)의 처 나씨는 나이 24세에 아들 없이 혼자 되었으나 개가하지 않았다. (중략) 임금이 명하여 이성만 (중략) 홍전의 처 박씨, 조탁의 처 나씨, 박조의 처 임씨 등에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고 그 집의 요역을 면제하게 하였다. (하략)
한림 조탁의 처 나주나씨에게 정문을 내리라는 임금의 명령이 있었다. 한림은 조선시대 예문관에 속해 있던 정9품 관직인 검열(檢閱)의 다른 이름이기에 조탁은 당시 중앙에서 근무했던 것으로 보인다.
58년이 지난 1478년(성종 9)의 ‘성종실록’ 8월24일 기록을 보면 예조에서 임무생의 상언(上言)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삼가 영락 22년 본조(本曹) 수교(受敎)를 살피건대 이르기를 ‘한림 조탁(趙琢)의 아내 나씨와 그 동생 임윤덕의 아내 나씨는 모두 남편이 죽자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하고 형제가 종신토록 같이 살면서 우애의 도리를 다하였으므로 모두 높일 만하니 복호(復戶) 하고 정문(旌門)하여 포장(褒奬)하라’고 했다.’ 정통(正統) 9년 3월 초10일 도승지 이승손의 봉교(奉敎)에 이르기를 ‘나씨 자매 자손은 복호하고 전세(田稅)의 모든 요역을 면제하라’고 했습니다. 위의 임무생은 진실로 임윤덕의 아내 나씨의 친손자이니 청컨대 수교에 의하여 복호(復戶)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절부리비 |
![]() 절부리비 |
![]() 나주 절부비(1420년 실록) |
![]() 나주 절부비(1478년 실록) |
![]() 나주절부비(신동국여지승람) |
●동생 나씨에게 정문…자손들 세금·부역 면제
영락 22년 즉 1424년(세종 6)에는 임윤덕의 아내인 동생 나씨도 남편이 죽자 3년 동안 시묘를 하고 다시는 결혼하지 않고 오랫동안 언니와 함께 살았으니 복호 즉 조세와 부역을 면제시켜 주고 정려문을 세워 표창하라는 내용과 함께 20년 뒤 정통 9년 즉 1444년(세종 26)에 나씨 자매의 자손에게도 세금과 부역을 면제케 하도록 해 임윤덕의 손자인 임무생에게도 혜택을 줬다는 내용이다.
1531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다. 전라도 나주목편 ‘열녀’조를 보면 ‘나씨 형제 호장(戶長) 나종(羅宗)의 딸들이다. 언니는 한림 조탁의 아내요, 동생은 견룡(牽龍) 임윤덕 아내다. 형제가 일찍 과부가 돼 남편 묘소에서 3년간 묘막(墓幕) 생활을 했다. 집이 가난했지만 제사는 오직 삼가하여 지냈다. 영락(永樂) 중에 목사 권천(權踐)이 조정에 보고해 북장리(北藏里)에 한 쌍의 비를 세웠다. 그 동리를 절부리(節婦里)라 하고 그 자손들을 복호(復戶)시켰다.’
이후 1847년 ‘호남읍지’나 1897년 ‘금성읍지’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1423년 7월~1424년 10월까지 재직한 나주목사 권천에 의해 언니와 동생 두 개 절부비가 세워지게 됐고 그 동네 이름을 북장리에서 절부리로 고쳐 부르게 됐음을 알 수 있다. 북장리는 나주읍성 북대(北臺)가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의 성북동 나주천주교회와 현대아파트 일원이다. 이 비는 원래 북장리 터인 성북동 나주천주교회 입구 왼쪽 흙담장 밖에 세워져 있었다. 1995년 동생의 비가 부러져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수습, 현재 위치인 나주문화원(향토문회회관)으로 옮겨 놓게 됐다.
●나주에서 제일 오래 된 비…문화재 지정 나서야
언니의 비는 높이 48㎝, 너비 37㎝, 두께 20㎝ 자연석에 앞뒤로 20자가 새겨져 있다. 앞면에는 큰 글씨로 상단 중앙에 절부리(節婦里)라 새겨져 있고 아래로 두 줄로 나눠 오른쪽에 고한림조(故翰林趙), 왼쪽에 탁처나씨(琢妻羅氏)라 새겨져 있다. 즉 ‘고 한림 조탁 처 나씨’라 읽을 수 있다. 뒷면에는 ‘영락 이십이년구월일(永樂二十二年九月日)’이라고 10자가 새겨져 있다. 영락 22년 즉 1424년 9월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으로 보아 현재까지 나주에서 발견된 금석문 중 제일 오래된 비가 아닌가 싶다.
동생의 비는 언니 비보다 키가 크고 날씬하다. 높이 98㎝, 너비 27㎝, 두께 21㎝ 다듬어진 화강암에 앞면에만 11자가 새겨져 있다. 상단 중앙에 큰 글씨로 ‘절부리(節婦里)’라 새겨져 있고 아래로 두 줄로 나눠 오른쪽에 ‘견룡임윤(牽龍林允)’ 왼쪽에 ‘덕처나씨(德妻羅氏)’라 새겨져 있다. 즉 ‘견룡 임윤덕 처 나씨’라 읽을 수 있다. 아쉽게도 라(羅)와 씨(氏) 사이가 부러져 있었는데 지금은 원형대로 세워져 있다.
나주문화원에서 2020년 이 두 비문을 탁본을 한 후 ‘나주 금석문Ⅰ’에 사진과 함께 게재했다. 이듬해인 2021년 여름 두 분의 신사가 문화원을 찾아왔다. 자기는 평택임씨인데 나주에 문중회의가 있어 온 김에 집안 선대 할머니 비석을 보기 위해 문화원을 찾았다고 했다. “할머니가 누구시냐”고 묻자 “임윤덕 할아버지의 나주나씨”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제서야 임윤덕의 본관이 ‘평택임씨(平澤林氏)’임을 알게 됐으며 나씨 자매는 ‘나주나씨(羅州羅氏)’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비를 안내하고 ‘나주 금석문Ⅰ’ 한 권을 드렸더니 이렇게 환대해주셔서 고맙다며 손을 부여잡고 연신 인사를 한다. 조그만 돌 비석에 불과하지만 역사가 있고 이야기가 있고 숭조(崇祖)의 정신과 사람의 정이 살아있음을 알게 해 준 고마운 시간이었다.
이 두 개의 비는 나주에서 제일 오래 된 비임에도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이제라도 자료를 확보해 지정 문화재라도 신청하면 좋을 듯하다. 그런 움직임이야말로 마을의 이름까지 바꾸게 한 나씨 자매의 절부(節婦) 이야기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