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동헌터서 물고기 노닐던 '수죽지'·금금헌 정자 추정 발굴
윤여정 나주문화원장

2019년 동헌터서 물고기 노닐던 '수죽지'·금금헌 정자 추정 발굴

윤여정 나주문화원장이 들려주는 천년 냐주
7)나주목사의 여행기 '남유록(南遊錄)

남유록 표지
남유록 번역집
송정희 나주목사 초상화
땅이름 즉 지명이 사람 이름보다 더 오래 됐다고 한다. 이동하는 인류의 속성상 그 위치를 표시하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위치를 아는 것이야말로 승리를 위한 기본전략이었을 터다. 지명의 발달은 곧 지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지도는 여행가, 무역상, 탐험가들의 필수품이자 도시 발달로 지역 구분도 지명만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필자는 향토사를 연구하면서 지명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지리지(地理誌) 또한 많은 지명으로 채워져 있다. ‘삼국사기’ ‘고려사’ ‘왕조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정부의 공식 지리지를 공부해야만 알 수 있는 것 역시 지명의 역사다. 족보를 만들어 조상의 흐름을 알 수 있듯이 지명에도 반드시 족보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명을 통해 시대별 변천 과정을 정리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선인들의 책 속에서 나주 관련 지명 찾기 심혈

선현들은 자연 풍광을 즐기기 위해 산천을 주유하면서 유록(遊錄) 또는 유산록(遊山錄) 등을 남겼다. 어느 곳을 다녀온 이야기를 쓴 여행기를 남기기도 했다.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등을 등정하고 쓴 작품 속에 많은 지명 이야기가 들어 있음도 알게 됐다. 이런 이름들은 큰 고을보다 계곡, 마을, 주막 등 작은 곳들의 이름이었기 더 중요한 위치 정보를 전달해 준다. 그 작품 속에서 나주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다. 남유록(南遊錄) 또한 그런 추적 끝에 찾아낸 자료다. 남유(南遊)란 한양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쓴 여행기 또는 남쪽 지방을 돌아보면서 쓴 기록을 말한다. 동유록(東遊錄), 서유록(西遊錄), 북유록(北遊錄) 등의 여행기도 많이 전해오고 있다.

송정희 나주목사 초상화
나주 동헌 금금헌 기록
● 나주 관련 여행기 3곳에 문집 소장

나주와 관련된 ‘남유록’을 검색한 결과 세 편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하나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다른 하나는 단국대학교 율곡기념도서관, 세 번째는 이하곤(李夏坤)의 문집에 기록돼 있음을 발견하게 됐다.

규장각 소장 ‘남유록’은 나주목사 송정희(宋正熙·1802∼1881)가 쓴 기록이다.

1863년 8월 부임한 송 목사는 지방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호남 여러 지방을 돌면서 기행시문(紀行詩文)을 남겼고 후손들이 모아 1922년 책으로 묶어 필사본 ‘남유록’을 펴냈다. 송정희의 자는 문오(文吾), 호는 풍야,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충남 회덕(현 대전시) 송촌에서 출생해 33세인 1834년(갑오년) 사마시(司馬試)에 진사 3등에 급제한 이후 음직(蔭職)으로 공조참판, 파주목사, 보은군수 등을 역임했다.

●금금헌·유색루·수죽지 등 새 지명 기록

남유록은 1863년 8월부터 1865년 6월까지 나주목사 재임 중 남도를 유람하면서 지은 시(詩)와 기문(記文) 등을 모은 책이다. 나주 관려 기록을 분류해 보면 시문 8편, 관청 중수기 3편, 각종 고유문 12편이 실려 있다.

시문에서 특별한 내용은 나주목 동헌(제금헌) 동쪽 작은 못 옆에 정자가 있는데 그 이름이 금금헌(錦琴軒)이라는 것과 객사 내 유색루(有色樓)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금금헌을 추적해 보니 나주 문인 나학경(羅學敬·1801-1875)의 ‘금촌유고’에 ‘제금당(製錦堂) 앞 수죽지(水竹池) 속에 노는 물고기가 활발하니 살도록 놓아주는 것이 마땅하네’라는 시를 통해 그 연못이 수죽지였음을 알게 됐다. 지난 2019년 동헌터를 발굴한 결과 연못 흔적을 찾아냈다. 수죽지에 있던 정자가 금금헌이 아니었나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나주를 기록한 ‘호남읍지’ ‘금성읍지’ 등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유색루(有色樓)의 존재였다. ‘유색루 시판에 차운하여 읊다(柳色樓次板上韻 九月 當在錦館夜吟下)’는 시가 있다. 송목사보다 선배인 조수삼((趙秀三·1762~1849)의 추재집(秋齋集)에 실려 있는 ‘유색루 시판에 화답하다’는 시를 차운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하곤(李夏坤·1677~1724) 선비도 1722년 남유록(南遊錄)을 남겼다. 12월 1일 기록에 “정목사에게 사례하고 함께 관아에서 식사를 했다. 신보(信甫)와 함께 금성관(錦城館)으로 가서 유색루(柳色樓)에 올라 동쪽으로 서석산(瑞石山)을 바라보니 눈이 온 후라서 더욱 아름답다”라며 ‘유색루에 오르다(登有色樓)’는 시를 읊었다. “높다란 유색루 나는 듯한 형세/올라보니 나의 호기와 맞먹네/영산강은 성을 안고 돌아 파도소리 크고/ 서석산은 하늘에 솟아 눈 색이 돋보이네”

황윤석(黃胤錫·1729~1791)의 이재유고에는 “나주목 금성관에 유색루가 있는데 세 글자는 금으로 칠해져 있어 사람들은 귀신을 쫓는다고 전해온다’는 재미있는 기록도 눈길을 끈다.

●나주 객사 유색루 정확한 위치 못찾아 아쉬움

조선후기 문신 조두순(趙斗淳·1796~1870 )의 ‘심암유고(心庵遺稿)’와 덕암 나도규(羅燾圭·1826∼1885) 의 ‘덕암만록(德岩漫錄)’에도 유색루를 읊은 시가 전한다.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김생(金生)의 편액 글자’라는 제목 아래 “나주 객사에 이른바 유색루가 있는데 제액(題額)은 김생의 글씨를 모아 만들었다. 옛날에는 도깨비들이 누각 안에서 소란을 피워 사람들이 들어가 지낼 수가 없었는데 편액을 써서 건 뒤 다시 근심거리가 없어졌다고 한다. 필력(筆力)이 부정한 것을 물리칠 수 있어 그런 것일까”라고 황윤석의 기록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관찬 지리지나 읍지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무등산·월출산·보림사·송광사 기록 즐비

남유록에는 1864년 음력 3월 시작해 1865년 여름 중수한 사실을 기록한 ‘나주향교중수기’와 1865년 2월 시작해 5월 준공한 것임 알려주는 ‘망화루중수기’가 실려 있다. ‘금성읍지’나 ‘나주향교지’ 등에 실린 나주향교와 망화루 중수에 대한 기록에는 없는 새로운 기록으로 확인됐다.

‘남유록’에서 눈에 띄는 것은 ‘유무등산기(遊無等山記)’ ‘유백암사기(遊白巖寺記)’ 유금산사기(遊金山寺記)‘ 유월출산기(遊月出山記)’ ‘유보림사기(遊寶林寺記)’ ‘유송광사기(遊松廣寺記)’ 등 사찰 관련 기문이다.

‘유무등산기’에는 무등산을 호남 제일 명산이라 했으며 ‘백암사기’는 1863년 9월 장성 백양사를 유람하고 절의 연혁과 주변의 경관을 기술하고 있다. ‘금산사기’는 후백제 견훤의 고사를, ‘송광사기’는 지눌(知訥) 이래 여러 명의 국사(國師)가 배출된 승보사찰이라며 선사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무등산 증심사, 백암사(백양사) 쌍계루, 나주 다보사, 영암 도갑사, 해남 대둔사와 미황사, 장흥 보림사 등에 대한 시도 남긴 것으로 미뤄봐서 불교에 상당한 관심과 공력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2020년 6월 나주를 방문한 은진송씨 종친회원들
●남유록 번역 은진송씨 문중 찾아가 승락받아

현재까지 전해오는 ‘유산록’은 대부분 선비들의 작품이지만 현직 목사(牧使)가 이런 글을 남긴 적은 거의 없었기에 번역해 널리 알리면 지역을 공부하는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문집 번역을 위해 은진송씨 문중의 승낙이 있어야 하기에 지난 2019년 나주에서 시인으로 활동하는 은진송씨 송가영씨의 안내로 대전시 은진송씨 대종회를 찾아갔다. 여러 종친들을 만나 나주문화원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랬더니 “문중에서 할 일을 나주문화원이 대신 해준다고 하니 후손으로서 부끄럽지만 도움 부탁한다”고 승낙했다. 나주로 내려오는 도중에 천안 단국대학교 율곡도서관에 소장된 ‘남유록’을 확인해 봤더니 아니! 송정희 목사의 ‘남유록’이 아니었다. 허탈하면서도 정보를 잘못 전한 도서관을 원망하며 발길을 돌렸다.

●2019년 국역남유록 출간…종친회 나주방문 감사패 전달

마침내 2019년 12월 나주문화원의 노력으로 ‘국역 남유록’이 간행됐다. 명쾌한 해제와 전문 번역가 노력으로 ‘남유록’을 만난 지 10여 년 만에 그 결실을 맺게 됐다.

2020년 6월 대전 은진송씨 대종회에서 연락이 왔다. “번역한 남유록을 받아 보고 너무나 기뻤다”며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어 6월15일 나주를 방문하겠다”고 했다.

은진송씨 대종회 송태영 종회장을 비롯한 10명의 종친들이 최기복 나주문화원장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나주문화원 발전기금을 기탁해 줬으며 은진송씨 관련 자료들도 전달해 줬다. 가슴 벅차고 보람있는 시간이었다. 지명을 찾아 나선 노력과 열정이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송정희 목사는 1881년 2월 향년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충북 옥천군 안남면 오류리에 안장돼 있다. 유고로 ‘풍야집’이 있다고 하나 문중에서조차 소재 확인을 못하고 있다. 참으로 아쉽다. ‘풍야집’을 만나는 게 또 다른 소망이다. 나주 이야기가 그 속에 얼마나 들어 있을까. 그 꿈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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