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산포 대흥발전소 |
![]() 한전 나주지점(왼편 첫 건물·현 신협) |
●1887년 경복궁 물 끌어들여 건창궁에 최초 전등 켜
1901년 개항지 부산, 인천 등에 전기회사가 차례로 들어섰으며 1917년 1월 순 민족자본으로 개성전기, 1919년 8월 금강산전기회사, 1929년 12월 일본 기업인이 세운 부전강 수력발전소 등이 차례로 설립됐다. 1932년 조선총독부는 ‘전기사업령’을 발동해 난립된 80여 개 회사를 경성전기, 남선전기, 서선전기, 북선전기에 나눠 통합시켜 버렸다. 해방과 6·25 이후 우리나라 전력은 남북으로 나뉘어 남쪽에서 경성전기, 조선전업, 남선전기 3사가 분점했으며 북쪽은 서선전기와 북선전기가 분점한 상태였다. 이로 말미암아 남쪽에서는 전력 부족 현상을 당하게 되는데 경영이 어려웠지만 경성, 조선, 남선 세 회사의 이기주의로 전력사업이 개선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다가 1961년 5·16 군사정부가 강력한 힘으로 1961년 7월1일 3사를 통합시켜 ‘한국전력주식회사’를 발족시킴으로써 ‘한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1982년 ‘한국전력공사’로 전환 하게 됐다.
●1914년 광주 수기동·1924년 나주 송월동에 전기회사 설립
그렇다면 광주와 나주에는 언제 전기가 들어 왔을까. 광주는 1914년 6월 소창(小倉·오꾸라) 등에 의해 전등주식회사 설립인가 신청 후 1917년 4월 자본금 5만원의 광주전등주식회사가 설립됐고 다음 달 5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3개월 만인 1917년 8월16일 전기 공급이 이뤄졌다. 회사는 동구 수기동에 있었으며 근처에 발전소를 따로 두고 있었다. 전선은 고압선과 저압선을 합해 연장 9㎞, 발전용량은 3500등 규모였으나 우선 1000개 등에 전력을 공급했다. 광주전등회사는 1920년 대구에 본점을 둔 대구전기에 합병돼 설립된 회사이름을 따서 대흥전기라 불렸다.
대구에 설립된 대구전기(후에 대흥전기) 설립자는 소창무지조(小倉 武之助·오쿠라 다케노스케)다. ‘조선 전기왕’이라는 칭호까지 받은 이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국보급 문화재 1200여 점을 약탈해 가서 오쿠라 컬렉션을 만든 바로 그 오쿠라다. 조선총독부와 결탁해 전기사업을 확장한 뒤 우리에게 전기를 팔고 그 돈으로 문화재를 사들이고 도굴까지 시켰던 그 사람이다. 정부에서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오쿠라가 가져간 문화재의 반환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민간소장품이라는 이유로 반환을 거부해 현재까지 단 한 점도 돌아오지 못했다.
나주는 1924년에야 전기회사 설립허가 신청이 시작된 후 1925년 2월 영산포상공회에서 흑주저태랑(黑住猪太郞·구로즈미 이타로)를 사장으로 하는 전남전기주식회사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4월 점등 목표로 본격 전기 도입에 노력한다. 그때 발전소는 송월동에 완사천 아래 있었다.
1925년 3월 10일 ‘동아일보’ 기사다. ‘영산포전등공사(榮山浦 電燈工事) 저번 설립인가를 득한 전남도 나주 영산포전기회사는 체신국에 공사시행 신청서를 제출한 바 허가되는 대로 공사에 착수하야 사월까지에는 점등하게 됐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지 못했던 지 9월 하순까지 공사를 준공하고 10월 1일부터 나주와 영산포에 동시 점등을 할 계획이라는 1925년 8월 18일 ‘조선일보’ 기사다. ‘나주전기시설 방금 공사중-전남 나주읍은 전남에 세 번째 되는 도회지며 나주군 영산포는 전남에 유명한 상업지인데 아직까지 전기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잇든 나주와 영산포 유지인사들은 작년부터 전기회사를 창입하야 총자본금 십만원으로 총독부에 인가신청을 제출 중이던 바 인가되었으므로 방금 공사 진행중인데 오는 9월 하순까지 전부 공사를 준공하고 10월 1일부터 영업을 개시하는 동시에 나주 영산포는 일시에 점등하게 되리라더라.(라주)’
![]() 영산포 주정공장(70년대) |
![]() 영산포 주정공장(70년대) |
![]() 수위측정소 |
마침내 10월14일 나주와 영산포에 전기불이 켜진다. 1925년 10월 23일 ‘조선시보’에 실린 기사(일본어)다.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전등 호성적-전남 나주 영산포에서 발기된 전남전등회사는 창립 이래 공사를 매우 순조롭게 진행하여 지난 10월 10일경에 전부 공사를 종료하고 전기국의 검사를 받으려고 한다. 13일 총독부 전기과에서 기사가 나와 14일까지 정밀검사를 끝내고 14일 오후 6시에 시험 점화를 하였는데 예상 외로 상태가 좋아 나주와 영산포가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나주와 영산포에 전등이 켜진 것은 1925년 10월 14일이라 하였으므로 내년 2025년은 나주에 전기 들어온 지 딱 100년이 되는 해라 할 수 있다. 2014년 빛가람 혁신도시에 한국전력공사가 이전 입주했다. 내년이면 만 10주년 되는 해이고 나주 전기 100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기념사업을 바라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 같다. 나주발전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나주에 전기를 공급하던 광주 대흥전기는 1930년에 들어서자 광주 뿐 아니라 주변 군단위까지 전력 수요가 증가하자 4월 전남전등회사를 대흥전기로 합병해 영산포에 발전소를 추가로 건립하기 위해 금성동 13번지(현재 나주신협 터)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바로 1931년 건립된 대흥전기 영산포발전소다. 그 위치가 현재 나주시 삼영동 영산강변에 있는 부영아파트 단지다. 필자가 어렸을 적 그 발전소 뒷산을 전기산이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가 있었기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조선일보’ 1930년 4월 6일 기사다. ‘대흥전기 송전선로 확장-대흥전기주식회사 광주지점에서는 나주, 영산포 방면에서 소요되는 전력의 부족을 광주발전소에서 보급할 목적으로 광주 영산포간에 송전선로 건설을 출원 중이든 바 4월 3일부로 허가되엇고 또 본 송전선로는 근간에 광주지점이 영산포에 건설하고서 일천(一千) 키로왓트 ’다│빤‘발전소를 낙성한 후에 차와 반대로 영산포에서 광주에의 송전용에 사용하라는 것이라더라.’
1934년 12월21일 ‘경성일보’에는 ‘사운(社運) 익익 융성 대흥전기회사 광주지점’ 제목과 함께 대흥전기회사 영산포발전소 사진과 아래의 기사(일본어)가 실려 있다.(일부 한글로 번역)
대흥전기광주지점은 1930년 전남전기회사를 합병하고 영산포에 2400키로와트 대발전소를 건설하고 송전구역을 광주를 위시해 나주, 남평, 영산포, 남원, 곡성, 영광, 법성포, 구례, 화순, 능주, 순창, 담양, 창평, 장성, 송정리 각지로 넓혔으며, 점등수는 10촉 기준으로 51,425등, 수용가는 9,085호에 이른다
나주와 광주까지 전력을 공급하던 대흥발전소는 1937년 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로 합병됐다가 1938년 목포로 이전하게 된다.
‘조선일보’ 1938년 10월 8일 기사를 정리하면 ‘남선전기합동회사 영산포발전소는 금년 중에 변전소로 변경하고 목포로 이전하게 되얏다는데 이로 인하야 회사측의 이익은 하로 평균 삼백원씩 되리라 한다. 지금까지 영산포발전소에서 송전한 곳은 나주, 광주, 담양, 화순, 전북 순창, 남원 등 이었는데 목포로 이전하려고 현재 공사를 급히 하고 있는 중이다. 원래 이 발전소는 대흥전기회사 때 영산포가 가장 적당하다고 인정한 결과 지은 것인데 그 후 남선전기합동회사에 매수되어 현 상태에 이르렀다. 이 발전소가 있기 때문에 영산포 지방발전상 기여한 바 컸는데 금년 중에 이전케 된다면 지방발전에 큰 타격이라 하야 영산포 주민일동은 크게 주시 중에 있다 한다. 그러고 발전소 직원 삼십 명과 사용인부 오십여 명의 금후 취직문제도 문제가 되고 있다 한다.’
●영산포 내륙 유일의 등대? 홍수 등 피해 대비 수위측정표
8년 동안 광주와 나주 인근의 전기를 공급하던 대흥발전소는 1939년 폐쇄돼 방치되고 만다. 해방 후 유리공장으로 사용되다가 소주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965년 곡물로 술을 만들 수 없다는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삼학소주를 생산했던 목포양조주식회사에서는 희석식 소주를 만들기 위해 이곳에 주정(酒精) 제조회사인 보해산업㈜을 설립해 고급 주정을 생산하게 된다. 당시 주정은 고구마를 말렸다가 증기로 찐 후 당밀(糖蜜) 등을 혼합해 만들었다. 필자의 기억 속에서도 나주나 무안 등지에서 고구마를 수매해 공장 인근 제방(대보)에서 기계로 얇게 썬 후 넓게 말리는 장면을 자주 본 적 있다. 말린 고구마(절간)를 슬쩍 집어와 군것질 대용으로 먹었지만 너무 딱딱해 턱이 아플 정도였다. 당밀은 열차 탱크로리로 운반했는데 영산포역 구내에 정차해 있을 때 친구들과 함께 당밀 출구에서 손가락으로 찍어 맛봤던 기억도 뚜렷하다. 흔히 흥인회사라 불렸던 이 공장도 1980년대 후반에 폐쇄돼 방치되다가 1998년 994세대 부영아파트가 건립돼 영산강 조망이 제일 좋은 아파트로 이름을 얻고 있다.
영산포 황포돛배 선착장에 가면 마치 등대 같은 하얀 시설물을 볼 수 있다. 영산포 사람들은 그 생김이 마치 등대 같아서 그랬는지 그냥 등대라 불러왔다. 심지어 ‘내륙에 있는 유일한 등대’라는 등 호칭을 붙이면서 호들갑을 떠는 이도 있었다. 물론 필자도 1960년대 초등학교 다닐 때에도 등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시설물은 사실 등대가 아니다. 1915년 건립된 이 시설물 정식 명칭은 ‘나주영산포 자기수위표(自記水位標)’다. 2004년 12월31일 국가등록문화재 제129호로 등록됐다. 영산포에 일본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주택이나 상가 등 도시가 형성됐는데 당시 호안 옹벽이 없었던 관계로 홍수가 나면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그래서 이 수위측정표를 만들어 외벽 수위를 보면서 대비를 했던 것. 당시 사진을 보면 유리등 비슷한 물건이 꼭대기에 설치돼 있지만 이것은 등대 관련 시설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영산포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25년 10월로 1915년에는 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부에는 어떤 기계적 설비가 있지 않다. 다만 목포에서 올라오는 배들이 그 모습을 보고서야 마침내 영산포에 도착했음을 알게 해준던 것 만은 틀림 없었던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