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흑산도 주민들 남포강변 거주 영산현으로 불러" …1879년
윤여정 나주문화원장

고려사 "흑산도 주민들 남포강변 거주 영산현으로 불러" …1879년

윤여정 나주문화원장이 들려주는 천년 나주
7)현 영산포, 옛 영산포(榮山浦)가 아니다
삼영동 내영산마을 영산현 흔적
영산포 지명 일제잔재 허구 증명
1915년 일본인들이 더 많이 거주
1937년 영산포읍 승격 공식 지명

1910년대 영산교(영산포발전지)
영산포 역
영산교 준공(동아일보 1933)
1970년대 초 영산대교가 가설되기 전 모습
나주의 백제시대 이름은 발라(發羅)였다가 통일신라시대에 금성(錦城), 금산(錦山)이라 불렀다. 고려 때에 이르러야 나주(羅州)라는 이름을 얻는다. 지금 우리가 쓰는 지명에는 반드시 시대적인 지문(指紋)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영산강(榮山江)은 어떤 지문을 가지고 있을까. 연원을 찾아가 본다.

●영산강 지명, 일제가 붙인 이름? 반박 기자 게재

지난 2005년 8월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게재된다. ‘전남 나주시를 흐르는 영산강. 이 강의 이름이 조선을 식량기지로 수탈했던 일제가 남긴 흔적이라며 이를 ‘일제문화잔재 바로알고 바로잡기’ 시민제안 공모 으뜸상으로 선정했던 문화관광부 광복 60주년 기념문화사업추진위원회가 18일 이를 취소했다.’

사연은 이러하다. 문화부와 광복60주년기념 문화사업추진위원회는 5월2일부터 ‘일제문화잔재 바로알고 바로잡기’ 시민제안공모전을 추진위 홈페이지를 통해 시작한다고 신문지상에 알렸다. 8월10일 문화관광부 광복60주년기념문화사업추진위원회는 방송과 언론을 통해 그 결과를 발표했다. 두 달간 ‘일제문화잔재 바로 알고 바로잡기’ 시민제안공모를 실시한 결과 606건이 접수돼 이 중 46건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유형별로 지명 305건으로 가장 많았고 언어 135건, 제도 17건, 교육 11건 등 건축·기념·조형물뿐 아니라 놀이문화, 문화예술, 스포츠까지 일제 잔재가 발견됐다. 으뜸상은 모 대학 교수가 제안한 ‘만경강 영산강’이 차지했다. 으뜸상 수상 이유는 만경강과 영산강이 조선시대 각각 사수강, 사호강으로 불린 두 강을 일제가 멋대로 만경현과 영산포구에 예속된 이름으로 변경시켰다는 것. 보도를 접한 필자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산강 이름을 일제가 만들었다고? 바로 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과 함께 반박자료를 작성해 문화관광부 광복60주년기념문화사업추진위원회와 수상자, 언론사에도 보냈다. 8월12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됐다. ‘영산강 명칭은 일제 잔재 아니다(종합)/나주 향토사학자·공무원, 각종 반박자료 내놔’ ‘영산강 지명은 일제잔재 재고증키로/광복60주년기념문화사업추진위원회 밝혀’ 마침내 8월 24일 신문에 앞의 취소 기사가 올라오게 됐다.

●흑산도 주민들, 남포강변 거주하며 영산현으로 불러

그렇다면 영산강은 언제부터 부르던 이름이었을까. 영산이란 무슨 뜻을 가졌는지 알아보자. ‘고려사’ 기록에 “남포진(南浦津)은 흑산도(黑山島) 섬 사람이 뭍에 나와 남포(南浦) 강변에 임시로 터를 잡으면서 영산현(榮山縣)이라 불렀다. 공민왕(恭愍王) 12년(1363)에 승격시켜 군(郡)이 됐다”고 돼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속현(屬縣)인 영산(榮山)은 본래 흑산도(黑山島)였는데 육지로 나와 주(州) 남쪽 10리 되는 남포강(南浦江) 가로 옮겼으며 공민왕 12년 갑진에 군(郡) 이름을 붙였다. 남포진(南浦津)은 주의 남쪽에 있는데, 배가 있다.” 위 기록으로 보아 영산이란 이름은 흑산도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초반 이하곤(1677~1724)의 문집 ‘두타초’에는 “성의 10리에 영산강이 있는데 일명 금강(錦江)이라 한다”고 나온다. 이긍익(1736-1806)의 ‘연려실기술’에도 “나주 영산강은 그 근원이 여덟이 있는데 <중략> 나주 동쪽에 이르러 광탄이 되고 나주 남쪽은 영산강이 되는데 이 강의 본이름은 금강진(錦江津)이다.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 羅州 山川條’에 “나주 동쪽 5리에서 광탄이 되고 서남쪽으로 흘러 학작암에 이르러 금강(錦江)이 되고 영산강(榮山江)이 되고 남포(南浦)가 된다.‘ 1879년 간행된 ‘금성읍지’ 산천조에 “금강은 주의 남쪽 10리 신촌면에 있다. 광탄 하류다. 영산포는 주의 남쪽 10리 지량면에 있다. 해산물을 실은 배가 모여들어 정박하며 인근 12읍의 물화가 서로 이뤄지는 곳이다.”고 돼 있음을 볼 때 이때까지도 금강(錦江)이라 불렸음을 알 수 있고 처음으로 영산포(榮山浦)란 이름이 등장한다.

1930년대 영산포구(京城日報)
지금의 영산포 전경
90년대 영산교
<>●영산강 원래 이름, 삼영동 택촌마을 앞 흐르는 강을 뜻해

금강(錦江), 금강진(錦江津), 남포강(南浦江), 남포진(南浦津), 영산현(靈山縣)은 어디인가. 금강과 남포강은 영산강 원래 이름으로 현재 나주시 삼영동 택촌마을 앞에 흐르는 강을 말한다. 금강진이나 남포진 또한 택촌마을에 있던 영산강 포구였다. 이 마을에는 조선초 운영되던 조창(漕倉)이 있었는데 그 이름 또한 영산창(榮山倉)으로 영산현 또는 영산강 가에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임이 틀림없다. 영산현의 흔적은 삼영동 내영산(內榮山) 마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영산현 안쪽에 있던 중심마을이었기에 그런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그러다가 조선 세종조 이후 왜구 토벌로 섬들이 안전하게 되자 흑산도 사람들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됨으로써 영산현은 폐현(廢縣)이 돼 역사 속에서 사라졌지만 영산강과 영산포라는 이름을 남겨주게 됐다.

현재 영강동, 영산동, 이창동은 1759년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신촌면(新村面), 지량면(知良面), 상곡면(上谷面) 등 3개의 면으로 나뉘어 있었다. 1897년 간행된 금성읍지(錦城邑誌)에 ‘영산포’란 이름이 등장한다. “영산포는 본주 남쪽 10리 지량면에 있다. 소금배가 정박하는데 12읍 물산이 어우러지는 곳이다.”

영산포가 지량면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원래 영산포인 택촌마을은 신촌면 지역이었다. 지량면 영산포는 신촌면 강건너에 있는 옛 영산포 선창 지역을 말한다. 이런 까닭으로 지금은 영산포 하면 당연히 영산동과 이창동, 가야동 지역을 통칭하는 말로 인식하게 됐다.

이 영산포는 1897년 목포가 개항 되면서 새로운 운명의 바람을 맞는다. 1895년 5월 산좌원차랑(山座圓次郞)이라는 사람이 부산에 있는 영사관에 ‘조선국전라도순회복명서’를 제출하는데 그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목포는 실로 한적한 한촌으로 주민은 농업을 유일한 직업으로 삼고 일찍이 상업과 운조업 등에 종사한 자가 없었다. 고로 한 척의 도선을 빼고는 그 밖의 선박을 가진 자는 오직 종래 영산포를 왕래하는 공미선(貢米船), 염선(鹽船) 등이 그때그때 정박하는 것을 볼 뿐이다. 곡물의 질은 전라도 중 나주 근방의 것을 최상으로 한다. 그 낟알이 크고 맛 또한 좋다. 영산포는 가장 번영할 장소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주, 능주, 광주, 남평 등을 비롯해 그 상류 지방에 출입하는 화물은 모두 일단 이곳에 모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1897년 목포가 개항되기 전부터 일본은 영산포를 식량(쌀)을 얻을 수 있는 최적지로 관심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03년 작성된 어느 일본인의 기록이다.

“영산강은 조선반도에서 6대 강 다음에 자리한다. 하구에서 20리 사이에는 강을 끼고 대단히 광대한 주목할 만한 평지가 있다. 목포에서 영산강이 굴곡한 물줄기를 거슬러 140리 쯤 영산포가 있다. 많은 한선들이 오르내리고 화물의 운반에 종사한다. 영산포 번영은 멀리 강경에 미치지 못하지만 동편에 남북 30리 동서 15리를 넘는 평지가 있다. 수년마다 홍수의 범람을 면할 수 없어 한인들은 그 약간을 경작할 뿐이다. 나머지는 황무지다. 이 황무지를 이용할 것이니라. 목포흥농회는 경영의 근거지를 여기에 두고 약간의 토지를 구입해 그것도 타군 사람이 착안해 근년에 일본인 이주를 보는 것은 기쁜 일이다.”

●일본, 쌀·면화 실어가기 위해 목포왕래 항로 준설

이들은 당시 황무지였던 영산강변 ‘방목평(放牧坪=현재의 관정들)’에 눈독을 들이고 옛 영산포 5일장 부근에 터를 잡고 뽕나무를 심고 양잠을 시작했으며 일본에서 석유, 철물, 장유 등의 생활필수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등 경제적 세력을 키워 나가는 동시에 이 지역 쌀과 면화 등을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목포를 왕래하는 항로에 준설을 했다. 기존 풍선(風船) 대신 1903년에는 발동선(發動船) 도입해 18시간 거리를 무려 5~6시간으로 단축함으로써 영산포 경제적 발전을 촉진하게 된다. 1904년 영산포우편수취소를 개설해 통신수단까지 확보해 나갔다. 1906년 영산포 거주 일본인들이 전남내륙에서 최초로 ‘영산포 일본인회’를 창설하고 일본인 소학교를 설립한다. 1908년 광주농공은행 영산포지점을 개설해 농지 관련 대출업무를 취급하기 시작했다. 1910년부터 시작된 동양척식회사의 일본인 농업이민으로 1915년까지 전국적으로 3164호, 나주군 지역에 108호 농업 이민자가 이주를 하게 된다. 1913년 호남선 영산포역이 영업을 개시함으로써 화물의 운송과 인력의 이동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1916년에 간행된 ‘영산포발전지(榮山浦發展誌)’를 보면 이때 상황을 알 수 있다. 1915년 12월말 현재 영산포 지역에 조선인이 136호 826명인 반면 일본인은 259호에 1095명으로 일본인이 더 많이 거주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당시 영산포는 일본인들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져 가는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호남선 철도와 영산포를 연결하기 위해 교량을 설치한다. 1914년 5월 9일 매일신보 기사다. “이미 일개월 전에 준공됐으나 수속이 끝나지 않아 지연됐던 영산포 정거장으로부터 시가에 이르는 개폐교 영산포교는 지난 1일 허가돼 3일부터 개통하였은 즉 인민의 편리가 다대하더라”

5월 15일 매일신보에도 “임취교 교통 개시”라는 제목 아래 ‘영산강의 임취교는 서울 편촌씨의 경영에 의해 가설 중이더니 낙성돼 5월 2일부터 교통을 개시했다더라’ 보도하고 있다.

이 다리는 나무다리로 교량 상판을 들어 올리는 개폐식임과 동시에 통행료를 받았던 다리였다. 그러나 홍수 때마다 파손을 당하는 등 피해가 많아지자 여러 차례 건의를 거쳐 1932년 12월 철근콘크리트 ‘영산교’가 준공됨으로써 영산포 발전 기폭제가 된다. 이처럼 영산강을 중심으로 철로(기차), 육로(자동차), 수로(선박)의 복합적인 운송체계가 형성되면서 영산포를 중심으로 한 나주평야 지역은 경제적으로 발전을 하게 됨으로써 1937년 영산포읍으로 승격된다.

마침내 영산포라는 이름이 공식 행정지명으로 쓰이면서 ‘영산포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1363년 영산현에서 시작돼 1937년 영산포읍을 거쳐 지금의 영산동까지 661년 영산포 역사는 오늘도 영산강물 처럼 도도히 흐르고 있다. 1964년 발매된 가수 송춘희의 ‘영산강 처녀’가 아스라이 들려온다. ‘영산강 구비 도는 푸른 물결 다시 오건만/똑딱선 서울 간 님 똑딱선 서울 간 님 기다리는 영산강 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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