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2대왕 혜종 모친 나주출신 장화왕후 오씨 숭배 건립
윤여정 나주문화원장

태조 왕건, 2대왕 혜종 모친 나주출신 장화왕후 오씨 숭배 건립

윤여정 나주문화원장이 들려주는 천년고을 나주 2)고려 태조 왕건이 세운 '흥룡사'
'영산포역앞 작은언덕 너머'
조선철도여행서 위치 언급
좌굴신삼씨 책자에도 기록
나주 내영사에 미륵불 보존
개성-나주시 교류 이어가길

미륵골에 있는 미륵
흥룡사(고적유물목록18-조선유적유물연구
조선철도여행안내서(1915년)
조선철도여행안내서(1915년)
나주 흥룡사 위치에 대한 고민은 줄곧 나주인의 화두였으며 연구자들의 추적대상이었다. 흥룡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있으니 그 주변이라는 생각과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전설이 깃든 현재 완사천 부근일 것이라는 추정만이 나오고 있다. 향토사학자들도 각종 지리지 등에 나온 흥룡사 기록을 통해 위치를 알려고 노력했지만 확신을 갖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을 인식한 나주시청도 학술발굴조사를 했지만 확실한 유구와 유물 등이 확인되지 않아 더 궁금증만 유발해왔다.

●2000년 흥룡사 위치 기록 최초 확인

필자가 흥룡사 위치에 대한 기록을 처음 확인한 것은 지난 2000년 초반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1918년 조선급만주사출판부(朝鮮及滿洲社出版部)에서 발행한 ‘조선급만몽총서 제2집(朝鮮及滿蒙叢書 第二集)’최신 조선지지(最新 朝鮮地誌) 중편에서다. 각도의 연혁, 위치지세, 하천, 기후, 교통운수, 산물, 호구, 도읍, 명승지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으로 나주군 도읍 부분에 나주, 영산포, 고막원역이 게재돼 있고 명승고적에 ‘흥룡사의 유지’라는 제목으로 그 내용이 실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흥룡사의 유지(興龍寺の遺址)’엔 ‘영산포역 앞 작은 언덕 너머에 있다. 전하기로는 고려 태조가 장화왕후 오씨를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오씨는 나주사람이다. 고려왕(왕건)이 이곳을 지나갈 때 길가에서 빨래를 하는 아녀자가 있어 왕이 물을 권하자 버들잎을 그릇에 띄워 주면서 급하게 마시지 말라 했다. 왕은 기이하게 여겨 왕비로 맞아 들였다고 한다. 절터는 그 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으며 그 샘은 지금도 맑은 물이 나온다고 한다.’

영산포역 앞 언덕(작은산) 너머에 있다? 지금까지 생각도 못했던 곳이기에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이를 계기로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영산포역에 대한 자료를 검색 추적했으며 마침내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철도여행안내(朝鮮鐵道旅行案內)’라는 자료 2건과 조선총독부박물관 소장자료를 통해 ‘흥룡사’에 대한 자료를 추가로 구축할 수 있게 됐다.

좌굴신삼씨의 책자에 있는 ‘흥룡사 터’
●영산포 출신 일본인 좌굴신삼씨, 흥룡사 터 확인

앞서 설명한 ‘최신 조선지지’에 나오는 영산포역과 관련된 자료를 추적해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철도여행 관련자료 3건을 확보했다. 그 첫 번째가 1915년 조선총독부 철도국(朝鮮總督府鐵道局)에서 출판한 ‘조선철도여행안내(朝鮮鐵道旅行案內)’라는 자료다. 이 안내서는 경부선·마산선·경인선·경의선·겸이포선·평남선·호남선·군산선·경원선·함경선 등 10개 노선과 이에 속한 175곳 역에 대한 정보 등을 담고 있다. 호남선에 대해서는 첫 면에 목포와 나주, 광주 전경사진과 다시면 구진포 터널과 영산강이 함께 보이는 사진 등 네 장이 실려 있다. 호남선 각 역마다 역 현황 및 지역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이 있고 ‘승지(勝地)’라 해서 역이 소재한 지역 관광지 등을 소개하고 있다. 영산포역에 명승으로 ‘흥룡사’를 소개하고 있다. ‘영산포역(나주군 나신면 대전으로부터 128마일7분)’ 영산포는 영산강 남안에 위치하고 남쪽 구릉을 끼고 북쪽으로 나주평야를 사이에 두고 목포, 광주, 나주, 남평, 장흥, 영암 등 요충지에 해당하며 예전 영산창을 두고 부근 세공미의 집적장이 되기도 한다. 곡물, 면화 등 산출이 많고 동산농장 그 외 현지인 농사 경영자가 많으며 호수 600여, 인구 2700여, 내지인 800명이 있다’

‘승지’는 ‘흥룡사 유지’ 역 전면 작은 산 너머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고려의 태조가 장화왕후 오씨를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오씨는 나주사람, 일찍이 태조 가 이 곳을 지나가며 길가에 빨래하는 한 부인에 물을 청했는데 부인이 그릇 안에 버들잎 한 편을 띄워 바치며 빨리 마시지 말라 하였으니, 왕은 기이하게 여겨 여인을 왕비가 되게 하였다고 한다.’

두 번째 철도여행안내서는 1918년 남만주철도 경성관리국에서 간행한 조선철도여행안내로 1915년판과 달리 사진은 게재돼 있지 않지만 내용은 거의 똑같다.

이렇게 흥룡사에 대한 정리를 하던 중 또 하나의 놀라운 기록과 만난다. 1931년 영산포에서 태어나 70년대 후반부터 영산포 일제강점기 역사를 기록하던 일본인 좌굴신삼(佐堀伸三·사호리 신조오)씨가 저술한 ‘영산강하류역 문화(전편)’이란 책(미간행 원고)을 20여 년 전 받았던 기억이 떠올라 서재를 뒤져 찾아내 확인해 봤다. 너무도 우연하게 사호리(佐堀)씨도 필자와 같이 1915년과 1918년 ‘조선철도여행안내’ 책을 통해 흥룡사가 영산포역 앞에 있었음을 알게 됐다. 그를 바탕으로 위치 추적 과정을 기록해 놓고 있다. 참으로 기이하고 놀라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는 흥룡사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추정 지역을 직접 방문하고 그곳 주민 증언을 기록하는 등 노력을 기울여 위치를 표시한 지도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사호리씨는 “농가에 가니 할머니 한 분이 집을 보고 있었다. “내가 이 집에 시집왔을 때 절터가 남아 있었다”면서 먼 곳을 응시하며 오래된 기억을 불러내는 듯 이야기했다. 90세가 넘었으니 역산하면 70년 전에 시집왔었던 것. 그녀는 질문에 척척 답하며 절터로 안내했다. “절은 12칸(間)으로 큰 절이었으며 근처에 산재돼 있는 기와편은 절 지붕의 기와였습니다”고 답했다. 현장에서는 기와파편이 상당 수량 확인됐다”는 증언을 기록해 뒀다.

흥룡사터로 추정되는 나주시 미륵골 항공사진
흥룡사 터 인근에 오씨 문중에서 조성한 건물.
●나주 내영사, 흥룡사 미륵불 모시고 있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조선총독부박물관 소장자료를 통해서도 흥룡사 흔적을 두 가지 추적할 수 있었다. 하나는 1916년 11월 17일 전남도장관이 총독부 정무총감에 보낸 문서 ‘전남도 고적 및 유물 조사서’로 조선총독부 ‘고적 및 유물 대장’에 등록할 물건의 소재지, 형상·촌척(寸尺), 현황, 유래·전설 등 상세 내용이 기재돼 있다. 그 문서 속에 ‘나주서문내 석등’을 조사한 내용 중 유래전설 기록에 ‘이 서문외 석등은 고려시대 흥룡사에 있었던 것이다’고 돼 있다.

또 하나는 앞서 설명한 ‘조선 유물유적 연구’로 전남도 ‘폐사지’ 내역에 흥룡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흥룡사 관련 유물이 하나 더 있음을 확인했다. 내영산 마을에 위치한 내영사(內榮寺)에 모셔진 미륵불이다. 주지 만허 스님은 이 미륵불은 예전에 미륵굴이라고 불리는 곳에 있었는데 1980년대 후반에 매입해 내영사에 모시게 됐다고 했다. 그 스님이 말하는 미륵굴이 바로 흥룡사가 있던 곳과 거의 일치한다. 스님은 그곳을 흥룡사 터였다고 아버지 스님에게서 들었다는 증언까지 해줬다.

‘세종실록’ 1428년 8월1일조에 “예조에서 계하기를 충청도 천안군에 소장한 고려 태조 진영, 문의현에 소장된 태조 진영 및 쇠붙이를 부어 만든 상, 공신들의 영정, 전라도 나주에 소장된 혜종 진영 및 소상, 광주에 소장된 태조 진영을 모두 개성 유후사(留後司)로 옮겨 각 능 곁에 묻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혜종사는 흥룡사 안에 있던 나주 출생 2대 왕 혜종을 모신 사당이었다. 나주 사람들은 혜종사의 혜종 진영과 소상이 개성으로 옮겨져 없어지게 되자 그 대신에 미륵불을 모시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꿈을 꾸어 보고 싶다.



●국립나주박물관 내 나수 서성문안 석등

국립나주박물관 내부에 들어서면 오른편 멋들어진 석등을 볼 수가 있다.

보물 제364호로 지정된 ‘나주서성문 안 석등’이다. 현재의 기록상으로는 나주 서문안에 있었는데 조선총독부에서 1929년 제1회 조선박람회(9월12일~10월30일)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실외 장식을 위해 그 해 9월 5일 일방적으로 나주에서 이 석등을 옮겨 전시물로 활용했다. 해방 이후에도 경복궁 내에 존치돼 있다가 지난2005년 용산에 새로운 박물관이 건립될 때 전시관 동쪽 끝자락에 옮겨 세워졌다. 2017년 국립나주박물관 노력으로 나주를 떠난 지 88년만인 5월11일 나주로 귀향하게 됐다. 비록 원래 자리는 아니지만 국립나주박물관을 찾는 이들을 환영하며 의젓이 자리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에는 일제강점기 사진자료와 총독부박물관 소장자료를 디지털화 해 2011년부터 일부를 시작해 2017년까지 문서와 사진 전체를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필자는 나주 관련 자료를 검색해 정리하던 중 폐사지 관련 문서에서 흥룡사 위치를, 나주 서문안 석등이 흥룡사 부속물이었다는 기록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주 서문안 석등이 흥룡사 것이라니. 놀랍고 감격스러웠다.

우선 고문헌에 나타난 흥룡사 지리적 위치 확인을 서둘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금성읍지’ ‘원감’의 시에서 흥룡사 위치를 공통적으로 “금강진 북쪽에 있다”고 돼 있다. 각종 지리지에 의하면 금강진(錦江津)은 “일명 금천(錦川), 목포(木浦)이며 혹은 남포(南浦)라 한다. 곧 광탄의 하류인데 주의 남쪽 11리에 있다”고 돼 있다. 이 금강진은 지금의 택촌마을 앞에 있었던 나루다. 영산강이 말굽 모형으로 포구 모습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고려말 흑산도 주민들이 공도령(空島令)에 의해 집단으로 이주한 영산현(榮山縣)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앙암(仰岩)이 보이는 곳에 있다”고 했는데 앙암은 금강진에서 바라다 보이는 바위 절벽으로 가야산 맥이 영산강에 멈춰 우뚝 서 있어 경관이 으뜸이다. 따라서 금강진과 앙암이 보이는 곳을 추적하면 바로 흥룡사가 있었던 곳을 알아낼 수 있다.

●개성과 나주, 사돈고을 간 교류 이어졌으면

이 조사를 하면서 많은 우연도 있었다. 그 중 가장 기막힌 우연은 흥룡사 터라 추정되는 토지 소유자가 나주오씨(羅州吳氏)였다. 현지 조사차 들렸을 때 경고문이 세워져 있었고 거기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는데 이게 웬일, 아시는 분이다. 문중대표 나종순 사장이다. 어떻게 해서 이 땅을 매입했고 건물을 짓게 됐는 지 묻자 나주오씨 문중에서도 장화왕후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 했으며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으면 그 토지들을 매입하곤 했는데 이 땅도 그렇게 매입했다는 했다. 우연이 아니라 인연이고 운명처럼 느껴지는 짜릿한 순간이었다.

그 터에서 영산강을 바라보면 문헌에 나와 있는 경관과 일치한다. 틀림없는 흥룡사 터임을 확신하게 된다. 빠른 시일 안에 흥룡사 위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발굴작업이라도 했으면 하는 욕심뿐이다. 나주는 고려개국 성지이며 왕이 태어난 어향(御鄕)이기도 한다. 만일 흥룡사가 복원된다면 부족함이 많았던 나주의 고려 역사가 보충될 것이며 나주목 위상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북한의 개성과 나주가 남북교류를 통해 사돈 고을과 번영을 나눠갔으면 하는 꿈이 현실이 됐으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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