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허비 |
●이원, 연산군 무오사화때 나주로 유배…갑자사화때 참형
‘이원(?~1504)은 본관이 경주(慶州)이며 자는 낭옹(浪翁), 호는 재사당(再思堂)으로 이제현(李齊賢)의 7세손이다. 아버지는 현령 이공린(李公麟)이며 어머니는 증이조판서 박팽년(朴彭年)의 딸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해 1480년(성종 11) 진사과에 합격하고 1489년(성종 20)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당인(黨人)으로 지목돼 곽산, 나주에 유배됐으며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했다. 이때 가산(家産)이 적몰(籍沒)되고 부모·형제 모두 연좌됐다. 나주의 영강사(榮江祠), 곽산의 월포사(月浦祠)에 제향되었으며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어 도승지에 추증됐다.’ 저서는 ‘금강록(金剛錄)’ ‘재사당집’ 등이 있다.
![]() 연산군일기-감옥(1504년) |
![]() 선천 유배(1498년)-연산군일기 |
![]() 선천 유배(1498년)-연산군일기 |
![]() 적거유허비(이덕수) |
![]() 감옥(1504년) 2(이야기)-연산군일기 |
![]() 처형(1504년)-연산군일기 |
나주 복암에 세웠다는 입명비와 적거유허비를 찾으러 나섰다. 복암은 노안면의 옛이름인 복암면일 수도 있고 영산강변에 있는 복바우일 수도 있기 때문에 우선 복바우 주변을 찾아 주민들에 여쭤 봤으나 다들 모르겠다는 대답뿐 확인할 수 없어 포기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22년 12월 목포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나선하 박사를 만났는데 10여 년 전 그곳을 답사 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도 반가웠다. 둘이 노안으로 달려가 복바우 주변을 뒤졌으나 확인을 하지 못하고 최종적으로 복바우 꼭대기에 올라 찾아보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길이 나 있으면 들어가 보고 묘지마다 확인을 해 봤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마지막으로 대나무 우거진 곳으로 가보니 작은 묘가 있었는데 단양우씨(丹陽禹氏)의 묘였다. 언뜻 입명비를 세웠다는 우복룡 나주목사가 떠올랐다. 두리번거리던 중 대나무 숲 사이로 빨간 벽돌이 보였다. 칙칙한 대숲을 뚫고 들어가 보니 그곳에 비가 있었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뻤던지. 대나무가 너무 우거져 사진을 촬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음번 연장을 가지고 와 정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지난해 5월 경주이씨 문중 허락을 받고 대숲을 정리한 뒤 비로소 자세한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지난 5월 문화재위원과 다시 들렸더니 일년만에 다시 대숲에 포위돼 있었다. 낫과 톱으로 정리하고 비석 상태 등을 확인한 결과 상당히 중요한 유물로서 보존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의견을 받았다. 오는9월 쯤 탁본한 뒤 조사를 더 하자는 결정을 하고 내려왔다.
●이원, 무오사화때 나주서 한양으로 압송 처형
1498년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을 무오년에 발생했다해서 ‘무오사화’라 부른다. 이때 이원은 김종직의 문도(門徒)로서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한 죄목으로 귀양을 가게 되는데 청천강 넘어 평안도 곽산이었다. 2년 후 1500년에 나주로 옮겨온다. 그곳이 나주 복암면으로 현재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산81-33 일명 복바우 정상이었다
그러다 다시 피바람이 부는 갑자사화가 일어난다. 연산군의 생모인 성종비 윤씨는 질투가 심하고 왕비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하자 성종은 1479년(성종 10) 폐비하고 다음해 사사(賜死)했다. 이른바 윤씨 폐비사건이다. 이러한 사실이 임사홍에 의해 연산군에 알려지자 연산군은 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윤씨 사사에 찬성한 윤필상, 김굉필 등 10여 명이 사형됐으며 이미 죽은 한명회,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 됐다. 사림파 최부, 이원, 홍귀달 등도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피해자 자녀와 가족, 동족까지 연좌돼 그 피해가 무오사화를 웃돌았다.
무오사화에 이원은 1504년 10월24일 나주에서 한양으로 끌려간다. 무오사화로 함경도 단천에 6년간 유배 된 나주 출신 최부도 한양으로 끌려와 이원과 한 감옥에 갇힌다. 늦은 밤 처형된 뒤 다음 날 아침 효시(梟示)됐다.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실록에는 감옥에 갇힌 이원과 최부의 이야기가 1504년 연산군일기 10월 25일 기사에 실려 있다. “듣건대, 최부와 이원이 형에 임하여 말한 것이 있다니 무슨 말을 하였는지 물어보라” 고 했다. 승지 윤순(尹珣)이 의금부 낭관을 불러 물으니 “최부는 한마디 말도 없었고 이원은 ‘우리 아들이 왔느냐? 보고 싶다”는 말 외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이 기사 말미에는 사관이 글을 덧붙였다. ’최부는 공렴 정직하고 경서와 역사에 능통해 문사가 풍부했고 간관이 돼서는 아는 일을 말하지 아니함이 없어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이원은 방달(放達)해 작은 예절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기우(氣宇)가 헌앙(軒昻)해 세속 티가 없으며 사람을 대하면 귀천으로 예의를 바꾸지 아니하며 술먹기를 좋아하고 담론을 잘했는데 이때 와서 죽임을 당하니 조야(朝野)가 애석하게 여겼다.’
이 두 선비는 죽어서 최부는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늘어지 마을에 묘를 썼고 이원은 경기도 양주시 덕계동 개성최씨 선영 안에 모셔졌다. 묘지명은 미수 허목이 지어 올렸다. 이로부터 100년이 지난 1604년 나주 우복룡 목사가 이원을 기리는 비를 세우는데 우복룡은 이원의 외증손자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비명은 ‘증도승지행예조좌랑이공원입명비’이며 오른쪽에는 두 줄로 ‘李齊賢之後裔 朴彭年之外孫 二家之賢 萃于一人’ 즉 ‘이재현의 후손이며 박팽년의 외손이니 두 집안의 현명함이 한 사람에게로 모였다’고 돼 있다. 이 글은 남효온의 ‘사우록’에 있다. 왼쪽에는 ‘萬曆三十二年九月日 外曾孫牧使禹伏龍 立’ 즉 ‘1604년 9월 외증손 목사 우복룡이 세우다’고 돼 있다. 비는 높이 120㎝, 넓이 56㎝, 두께 19㎝ 돌에 새겨져 있다. 삼면에는 아무 글도 새기지 않았다. 입명(立命)이란 “천명을 좇아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는 뜻으로 억울하게 돌아가신 선조께서 이제는 편안하시라는 의미로 비를 세운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비 옆에는 잘 다듬어진 우복룡이 이원의 입명비를 세웠다는 내용과 이원이 이곳 나주에서 적거(謫居)했다는 내용과 후손인 나주목사 이형곤이 입명비를 정비했다는 내용을 새긴 이 비는 비명이 제일 오른쪽에 있다. ‘재사당이선생적거유허비(再思堂李先生謫居遺墟碑)’로 재사당은 이원의 호다. 폭 48㎝, 높이 120㎝, 두께 21㎝로 총 354자가 열 줄로 새겨져 있고 ‘嘉善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李齊賢 撰’ 마지막 줄에 ‘七世孫通政大夫行光州牧使明坤 書’라 새겨져 있다. 즉 이제현이 글을 짓고 칠세손 광주목사 이명곤이 글씨를 썼다는 말이다.
비문은 ‘재사당일집(再思堂先生逸集)’ 卷2에 ‘적소유허비(謫居遺墟碑) 이덕수(李德壽)’란 제목으로 실려 있으며 이덕수 문집 ‘서당사재(西堂私載) 卷之四 記‘에 ’재사당유지기(再思堂遺址記)‘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1976년 2차 유허비 중수…1940년 신문에도 실려
이 비와 관련된 기록이 또 있다. 바로 후손 이형곤(李衡坤) 나주목사가 선대 입명비를 정비하고 남긴 ‘입명비중수사실(立命碑重修事實)’가 이원의 문집 재사당일집에 실려 있다. ‘7대조 재사당 선생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참화를 당하였고 뒤에 외증손자인 우복룡 나주목사가 입명비를 세우게 되었는데 20자의 글자를 새겼다. 그 후 1727년에 후손 이형곤이 나주목사로 와서 풀더미에 묻혀 있던 조변을 정리하고 비석을 씻어내고 글자를 다시 새긴 후 벽돌을 쌓아 위를 덮어줬다’는 내용이다.
두 개의 비 옆에는 또 하나 비가 있다. 후손들이 유허비를 중수했다는 ‘재사당이선생유허중수비(再思堂李先生遺墟重修碑)’다. 1차 중수는 1922년 2차 중수는 1976년에 했다고 돼 있음을 볼 때 이 비는 1976년에 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후손들의 정성이 돋보였다.
이 이원 일가에 대한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신문에도 실려 있다. 조선일보 1940년 8월1일 이원의 여덟형제 출생과 관련된 아버지 이공린(李公麟)의 여덟마리 자라(鼈) 꿈 이야기가 팔별(八鼈)의 기몽(奇夢)(一)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고 같은 신문 1940년 8월 3일 이원 선생의 이야기가 (二)편에 실려 있다.
우연히 시작된 향토사 탐구가 현장에서 귀하고 오래 된 비를 만나게 되고 그 역사를 추적하고 그 사실들을 알아내고 그것을 글로 정리했을 때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필자 외가(外家)가 경주이씨였기에 더 관심이 갔고 남다른 정성으로 일을 정리해 나갔다. 이제는 가을에 탁본을 마치고 자료를 정리한 뒤 문화재 신청하는 시간만이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