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여정(오른쪽) 나주문화원장이 송애 이지헌 묘소 참배하고 있다. |
![]() 이지경의 묘(나주 다시면) |
![]() 밀양 아산장씨 묘 |
관청일기인 ‘금성일기’는 현재 일본 모 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으며 1989년 나주문화원에서 번역 간행한 적이 있으며 다시 자세한 설명을 가미한 ‘역주 금성일기’는 오는 11월 발간예정으로 작업하고 있다.
여행 기록인 ‘금성일기’는 필자가 20여 년 전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 검색을 통해 소장자료 가운데 ‘금성일기’가 있음을 확인하고 출력 후 비교해 보니 기존 ‘금성일기’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금성일기’는 송애 이지헌(李志憲)의 문집인 ‘송애집(松厓集)’에 실려 있는 글이다. 내용을 보니 경남 밀양에 사는 이지헌이 1877년(고종 14) 10월 함평이씨 도선산이 있는 나주군 다시면 신석리 분토동(粉土洞·당시 나주목 시랑면 분토동)으로 선조 제향을 위해 걸어서 왕복한 26일간의 행적을 일기형식으로 쓴 기행문이다.
왜 밀양에서 나주를 왕래하게 됐을까. 경남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는 함평이씨 집성촌으로 경상남도 문화유산 제130호로 지정된 함평이씨 재실인 의첨재(依瞻齋)가 있다. 이곳 입향시조가 바로 나주에서 온 분이었던 것. 나주시 다시면 신석리 분토동 함평이씨 도선산에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 밀양 아산장씨 묘 |
![]() 나주 다시 이지경의 묘 |
![]() 금성일기(송재이지헌) |
![]() ‘영남 밀양선비의 호남나주 나들이’ 출간 |
함평에 자리 잡았던 함평이씨가 나주 다시에 정착하게 된 데는 9세 이자보(?~?)로 모평감무를 역임하고 나주 회진(시랑)에 입향했다. 그의 아들 병조판서 이극명(1388~1454)이 1450년 다시면 죽산리 죽지(대못)마을로 오면서 가족이 번성하게 됐다.
극명의 둘째 아들 11세 종수(從遂. 1424~1483. 참판공)를 이어 12세 宗仁(송인 1458~1533·소요정 주인·逍遙亭 主人)도 병조참판을 지내고 13세 시를 거쳐 14세 유근(惟謹)은 지효(止孝), 지경(止敬), 지민(止敏) 삼 형제를 뒀는데 밀양과 관계있는 분이 바로 둘째 지경(止敬)이다.
그의 묘갈문을 보자. ‘공의 휘는 지경이요 성은 이씨이며 본관은 함평이다. 공은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판서공 휘 지효(止孝)의 동생이시다. 충효우를 일찍 정훈받아 크게 촉망을 받았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돌아가시니 나주 분토동 선영 서록 임좌 언덕에 반장했다. 배(配)는 아산장씨로 찰방 장경신(蔣敬臣)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뒀는데 이름은 선지(先智)이다. 정축년(1577년)에 공인께서 아들을 데리고 친정인 밀양으로 이거했다.(2006년 14대손 재기(載器)의 번역글)’
이것이 바로 함평이씨의 밀양 입향의 시작이다. 밀양 함평이씨 문중에서는 매년 나주 다시 선영에 모신 할아버지 지경(止敬)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한 달여에 걸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며 그 기록이 바로 ‘금성일기’다.
●담양·나주·화순 등 열두고을 고개·주막·누정 관련 시 담겨
다시 일기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금성일기’를 쓴 이지헌(1840~1898)은 조선 말기 유학자로 자는 만첨(萬瞻)이고 호는 송애(松厓)이다. 본관은 함평(咸平), 거주지는 경상북도 밀양군 부북면(府北面)이다. ‘송애집’은 1925년 송애 이지헌의 맏아들 이계동(李啓東)이 부친의 유고를 수습해 4권 2책 석인본으로 간행했다. ‘송애집’ 실물을 보고자 간절한 마음으로 인터넷 고서점을 검색한 결과 마침내 건, 곤 두 권의 ‘송애집’을 구할 수 있었다. 책의 상태도 생각보다 양호해 송애선생과 인연이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금성일기’는 송애 이지헌이 38세 되던 1877년 10월 5일 출발해 선조의 묘가 있는 나주 다시면에 갔다가 10월30일 다시 밀양에 도착할 때까지 기전체 형식으로 쓴 글로 ‘송애집’ 제3권에 실려 있다. 여행 중 밀양, 의령, 산청, 함양, 남원, 순창, 담양, 나주, 화순 등 열두 고을에 있는 고개나 주막, 누정 등에서 열 세편의 시를 읊기도 했는데 ‘송애집’ 제1권(詩) ‘금성기행(錦城紀行)’편에 실려 있다.
1877년 10월5일 밀양시 부북면을 출발해 밀양, 의령, 합천, 산청, 함양을 지나 남원, 순창, 담양, 광주, 나주에 이르는 열하루의 길이었고 4일 동안 나주에 머물다 10월20일 돌아가는 길은 나주, 남평, 화순, 동복, 순천, 광양을 거쳐 경상도 하동, 사천, 진주, 함안, 창녕, 밀양으로 돌아가는 열하루의 길이었다. 결국 나주 다시 선영에서 보낸 4일을 포함하면 총 26일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버스타고 밀양까지 ‘금성일기’ 노정 답사
‘금성일기’ 노정을 확인하고 나니 그곳을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2015년 6월18일 김희태 문화재전문위원과 함께 승용차가 아닌 버스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광주에서 밀양으로 가는 버스노선이 없지 않는가. 어쩔 수 없이 진주를 경유해 밀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밀양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기록에 있는 부북면 정골마을로 향했다. 막상 도착해 물어보니 여기에는 함평이씨가 살지 않을 뿐 아니라 송애 이지헌 선생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부북면 면사무소에 전화를 해 부북면 어느 마을에 함평이씨가 많이 사느냐고 문의했다. 제일 오래 근무한 분이 부북면 퇴로리에 제일 많이 산다고 하기에 마을 이장 전화번호를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 번호로 전화해서 송애 이지헌 선생 후손을 찾는다고 하자 잘 알고 계시는 분이 있다며 바꿔준다. 그 분은 “그냥 택시를 타고 마을로 오면 된다”고 했다. 좋은 인연의 시작이었다. 도착하니 회관에서 회의를 마치고 식사를 하고 있어서 식사대접을 받았다. 우리에게 이지헌 선생의 금성일기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면서 할아버지의 고향에서 오신 분들이라며 고마워 했다. 그 분이 이재기(당시 79세) 선생으로 송애 이지헌의 종증손이고 밀양 예림서원 원장을 맡고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이재기 원장이 우리 일행을 함평이씨 재실(의첨재 依瞻齋)로 안내하고 족보와 문중 문서 등을 보여줬다. 그곳에서 또다른 나주 왕복 자료를 만나게 된다. 바로 ‘추모집 나주사적(追慕集 羅州事蹟)’이라는 소책자였다. 나주 다시에서 밀양으로 오게된 함평이씨의 역사와 송애 선생이 다녀간 1877년보다 50년 앞선 1826년(순조 26) 기록인 ‘나주노정기(羅州路程記)’가 실려 있는게 아닌가. 확인하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1826년 1월30일~2월28일까지 29일 동안 밀양에서 나주까지 645리(里)를 걷고 다시 나주에서 밀양까지 600리를 왕복한 사항을 기록한 내용이다. 비록 날자별 교통로와 거리, 숙박지만을 기록해 아쉽기는 하지만 남아 있다는 자체가 대단한 감격이었다. 이 ‘추모집 나주사적’은 2019년 함평이씨 참판공파 오례문중에서 번역 출판해 후손들에게 배포됐으며 우리를 안내해 줬던 이재기 원장이 손수 보내줬다. 자세히 살펴보니 ‘나주노정기’는 단순한 왕래의 기록이 아니고 지경(止敬) 할아버지 묘역에 석물을 설치하는 과정을 날짜별로 정리한 기록이었으며 자금을 융통하는 과정까지도 기록한 후손들의 정성이 가득한 책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가 나중에 나주 다시 분토동 묘역을 살펴봤더니 그때 설치했던 석물이 그대로 배치돼 있어 또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한 적이 있다.
●2020년 ‘영남밀양선비의 호남 나주나들이’ 책으로 출간
다음 날 이재기 원장 안내로 함평이씨 밀양 입향조(護軍公 先智의 母親 恭人 牙山蔣氏) 묘소와 재실, 송애 이지헌공 생가터를 찾아 직계 후손인 이원기(당시 98세), 이재하(이원기옹 아들), 이학범 이장을 만나 함께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묘에는 비석이 없었고 상석에만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松厓處士咸平李公諱志憲墓□□□亥坐五百三十四年乙丑’ 즉 1925년 4월 상석을 세웠다는 기록이다. 김희태 위원과 함께 큰 절을 올렸다. 감사의 절이었다. 참배를 마치고 광주로 출발하려 하자 이원기 어르신이 차가 없는 일행을 위해 창녕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나선다. 송애공이 출발해 처음으로 고향을 보며 시를 지었던 청도면 감곡령에 이르러 국수로 점심까지 대접해 준다.
필자와 김희태 위원은 밀양을 다녀 온 후 ‘금성일기’를 그냥 기록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만들면 좋겠다는 의견을 나눴다. 그 결과 2020년 나주문화원에서 ‘영남 밀양선비의 호남 나주 나들이’라는 책으로 번역 발간하게 됐다. 밀양과 나주의 함평이씨 문중에서도 많은 관심과 응원을 해 준 결과다. 기록을 남겨 준 선현들의 정성에 감사를 드린다. 기록은 또 다른 기록으로 이어지게 연결해주는 힘이라는 점을 느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1877년 10월 14일 송애 선생이 나주에 들어서면서 읊었을 시를 147년 후인 오늘 우리 글로 한 번 읊어본다. 금성 동문루에서 錦城東門樓 ‘서쪽으로 와서 비로소 금성 땅에 이르니(西來始到錦城天)/고개 돌려 동쪽 구름 보니 저 멀고 먼 곳(回首東雲正渺然)/여행객이 지난 온 길을 기록하려니(記得旅人行過處)/얼마나 많은 높은 산과 큰 강을 함께 했는가(幾多崇 (山+章) 與長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