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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기에 일상에서 벗어나 서로의 시선을 환기하고 위로가 필요할 때면 누군가 먼저 만남을 제안한다. 또 누군가는 선뜻 응한다. 가족은 아니지만 무조건 지지하고 환대해 주는 문우를 통해 큰 위로를 받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지칠 때뿐 아니라 좋은 일이 있을 때(문학상을 타거나 했을 때)도 우리는 열렬히 축하해준다. 옛날 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멀쩡한 배가 아프다고 했는데 우리는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것이 가능하다. 왜냐면 서로의 활동 분야가 다르기에. ㅎㅎ.
오늘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SNS를 하는 소설가가 문단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최근 산불로 인해 울진에 있는 시인의 집이 전소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나와도 좋은 인연으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인지라 남 일 같지 않았다. 지난해에 사직도서관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생전 처음 방문한 양림동이 좋아졌다며 양림동에 관한 시를 쓴 시인인데 이를 어쩌나 싶었다. 그런 데다 시인은 몇 년 전에 일산 호수공원 앞에서 책방을 하다 빚만 안고 책방을 정리했다. 그 후 상금과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 겨우 울진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작업실 겸 집을 마련한 것이다. 그 시인은 처음 이사를 하고 나서 얼마나 신이 났던지 줌미팅을 할 때 카메라 렌즈를 불쑥 언덕 너머에 있는 바다를 비춰주기도 하고, 지나가는 옆집 할머니에게 대뜸 언니라고 부르며 넉살을 부리기도 했는데 말이다. 커다란 고무통 한가득 물을 받아 놓고 이웃집에서 준 상추를 씻을 거라며 시골 인심을 자랑하기도 했는데 어떡하나. 바다가 보고 싶거든 방 한 칸 내어 줄 테니 언제든 묵어가라고 한 집인데 어떡하나.
나는 바로 전화를 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황망함이 진하게 묻어났다. 이제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며 그녀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재난으로 인해 서울의 최고 대학의 출강요청을 받고도 한동안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밤마다 불면으로 지새우고 깊어진 상실감과 우울로 심리상담을 여러 차례 받기도 했단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기에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지금은 강의를 나가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정말 앞이 캄캄하다는 말밖에 아무 생각도 안 난다면서 "나 광주가면 조세핀 시인이 재워 줘야 해" 하며 통화를 마쳤다.
사람이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을 겪을 수도 있다지만 한순간에 내 집이, 하나밖에 없는 보금자리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시인이 처한 상황이 내게 처한 상황처럼 먹먹할 뿐이다. 어디 그 시인뿐 이겠는가. 지금 산불로 인해 한순간 이재민이 되어버린 수많은 국민들이 하루빨리 일상으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목련과 벚꽃, 개나리가 흐드러지고 철쭉도 삐죽 올라오고 있는 봄. 여기저기 지천에 봄이 왔건만 아직 겨울 한 가운데서 추위에 떨고 있을 그 시인과 이재민들을 생각하니 울적해졌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갤러리카페로 갔다. 멀리서 힘이 되지 못하고 동동 커지는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달달한 아포카토를 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눈앞에 보이는 통 창이 연두로 초록으로 차오르고 있다. 봄을 시샘하는 바람이 제아무리 드세고 거칠 지라도 기어이 오고야 마는 봄처럼 그 시인에게도 이재민들에게도 환한 봄이 폭삭 오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