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집 사랑채 앞에 섰다. 삶의 터전을 따라 형제들이 이리 저리 흩어지면서 버려진 옛집. 티격태격 살 비비며 어우러졌던 안채를 뒤로하고 사랑채에 발길이 머물 때면 설렘으로 또는 애틋함으로 눈물까지 그렁해진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정인들의 인기척이 느껴지기도 하고, 아롱아롱 성글게 조율된 인간의 화음이 오롯한 전설이 되어 곳곳에 각인되어 있다.

생각해보니 안채가 생존욕구를 해결하는 현실의 공간이었다면 사랑채는 존재와 자존감을 일깨우는 이상의 공간이었다. 어른들 속에 섞여 앉아 야학으로 한글을 깨친 곳도, 도회지에서 오신 학교 선생님들이 머물며 함께 책을 읽고 노래를 부르던 곳도, 대학생 삼촌과 교과서 속 문학작품에 대해 밤새 토론을 벌였던 곳도 다름 아닌 사랑채였다.

사랑채의 여러 방들에는 동네 사람이나 지인들만 찾아드는 것은 아니었다. 담양의 대바구니 장사, 남원의 칠기(漆器) 장사, 염산의 새우젓 장사와 소금 장사, 고수의 옹기장사…. 그들은 하룻밤 숙식비 대신 신선한 바람을 일으킬만한 이야기들을 남기고 떠나곤 했다. 초저녁엔 투박한 사투리로 온갖 경험담들을 걸쭉하게 늘어놓다가 밤이 깊고 입심이 붙기 시작하면 나름대로 각색한 전설, 민담, 신화에 이르기까지 어울더울 판이 벌어졌다. 눈 오는 겨울밤 할아버지의 화롯가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미미하게 달라져가는 줄거리들을 가려내 툭툭 질문을 던지는 재미가 쏠쏠했다.

우리의 이야기판은 그렇게 구연자 혼자서 주도하는 독주가 아니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언제든 끼어들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었다.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민주적 담론장이고 열린 교육의 장이었던 셈이다.

이야기가 주는 저력 때문인지 오랫동안 구전되어온 한 집안의 이야기들이 진화되어 가문문집을 탄생시키고 시대를 풍미한 작가들까지 배출한 사례가 많다. 더욱 시선을 모으는 것은 그 이야기판의 중심인물이 남자가 아닌 어머니나 할머니들이 허다했다는 점이다.

“-할매, 낭자는 으짜고?/ -야는 집에서 기다리지 으째, (중략)/ -억시기 반갑겠제./ -반갑고 말고./ 선비는 너무 반가와/ -여보, 내가 왔소./ 한 마디 부르짖자,/ 그 자리에서 낭자는 하얗게 재가 되어 삭아 내렸다./ 할머니는 이야기를 마치자,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손자를 바라보았다./ -할매./ -…/ -할매./ -….”

박목월의 ‘전설’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구연자와 청자를 선뜻 구분하지 못할 만큼 두 사람의 정서적 공감은 상상과 사유를 넘어 이해와 감동으로 하나가 되어있다. 선하고 맑은 심상의 흐름은 언급도 없는 할머니의 처지까지도 들여다보이게 한다. 화자와 청자의 심리상태나 입장에 따라 언제든 새로운 이야기로 변색될 수 있는 포용성은 본질이 인간중심에 있는 우리 이야기판의 특성이기도 하다. 섭리에 순응하는 순연한 마음으로 인간의 일을 자연스럽게 풀어내어 둥글둥글한 곡선을 그리며 교감과 감흥에 도달하는 은근한 멋!.

우주와 인간과 문명의 창조를 다룬 우리의 신화들 역시 서구의 신화에서 보이는 천지개벽이나 우주적 서막을 알리는 장엄한 서곡이 없다. 단군이나 주몽 등 건국신화들마저도 온갖 고초를 인내와 끈기로 이겨내고 나서야 인격전환의 존재가 되는데 이 또한 지극히 인간적이다. 심지어는 부모로부터 버려진 아이 ‘바리데기’ 무속신화는 물론이고, ‘연오랑 세오녀’와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같은 민담도 아주 평범한 인간으로 살다가 해와 달의 정기를 갖게 된다.

얼마 전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작품상이나 감독상, 국제영화상도 대단한 일이지만 각본상 수상은 우리의 인간적 이야기가 세계에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아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신분은 꽁꽁 감춘 채 한순간에 사람을 매장시키고 죽이기까지 하는 현대적 이야기판 댓글놀이가 자꾸만 세상을 아프게 하고 있다. 인간의 감성과 감성이 만나 솔바람 같은 정을 만들어내던 내 어린 시절의 사랑방 이야기가 무척이나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