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강’ 맑은 물소리가 남실바람을 타고 영산강을 향해 줄달음치는 곳. 오래 전부터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었던지 초기철기시대에서 원삼국시대까지의 농경사회를 알 수 있는 신창동 유적지가 근동에 있고, 백제시대의 고분군, 서원, 정려, 폐사지, 정자, 당산 등이 어우러져 그 땅에 흘러내린 세월의 깊이가 다물다물 쌓여있는 곳. 어느 집 사립문이건 불쑥 밀고 들어서면 웃음 가득한 살붙이가 뛰어나올 것만 같은 고향 같은 곳.

오래 전, 광주의 본향이자 관문인 ‘월계동’ 주변은 그렇게 전설 같은 자연 마을들이 극락강을 베개 삼아 도란도란 한 폭의 그림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야말로 잡념 없는 맑은 생명의 소리들로만 가득한 땅이었다.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한국적인 마을풍경들에 젖어 한때는 극락강물을 거스르기도 하고, 함께 따라 흐르기도 하면서 그곳에 서있는 순간이 참으로 많았다. 이미 ‘첨단단지’라는 이름을 달고 도시로 탈바꿈한지도 30여년이나 흘렀건만, 습관은 쉬 버릴 수가 없는 것인지 지금까지도 간간이 이어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핑계는 문화유적 답사이지만, 나날이 변해가는 마천루 속에서 눈으로 하는 답사는 슬프게도 이미 끝나버렸다. 다만, 가슴 밑바닥에 고여 불현듯 찰랑거리곤 하는 따스하고 깊은 소리들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곳에만 서면 늦가을 밤 ‘철커덕 철커덕’ 어머니의 베 짜는 소리도, 온 마을을 신명난 잔치판으로 만들던 ‘동동구르무’ 장사의 북소리도, 생일 때마다 읽어주시던 할머니의 백살경(百殺經) 소리도, 모이기만 하면 까르르거리던 어린 형제들의 웃음소리도, 봄날 하늘 끝에서 울던 종다리 소리도, 할아버지의 애장품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던 춘향전 한 대목도 우련하게나마 피워 올릴 수가 있다.

오늘만 해도 월봉마을 뒤편에 위치한 월봉서원 옛터를 슬쩍 훑는 것으로 그치고는, 월계(月桂), 반월(半月), 월봉(月峯), 산월(山月), 옥토봉(玉?峯) 망월봉(望月峯) 등 달나라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이곳의 지명들에 팔려 또 다른 수많은 소리들 속으로 빠져들었다. 계수나무 밑 옥토끼의 절구질 소리도 듣고, 어린 시절 달맞이에서 외쳤던 “망월이야!” 소리도 몇 번이나 들었다.

되돌아 나오는 길, 문득 고분들이 궁금했다. 겨우 살려놓은 월계동 장고분 2기를 제외하고라도 칠봉이라고 해서 7기의 무덤이 함께 있었다고 전해지지 않던가. 섬배미들과 그 유명했던 뚝뫼 자리는 어디란 말인가. 황사바람으로 희불그레한 들녘 쪽을 망연하게 눈으로 더듬는데 농신제를 지내는 유월 유두날의 농악소리만이 ‘쟁- 쟁- 쟁-’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빽빽한 건물들이 가로막아 코앞도 가늠하기가 어려운 내촌(內村)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무양서원’ 부근의 유적들이 아른거린다. 끌림은 근원을 향한 본능적인 그리움이었던가. 답사에 빠져있던 시절, 본향이 이곳인 나는 감격스럽게도 조상들을 거스를 수 있는 여러 유적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 ‘탁송정(卓松亭)’ 터에 있던 당산을 동네 사람들은 ‘큰당산’, ‘귀향나무’라고 불렀는데 정월 대보름이면 치성을 다해 당산제를 지내며 마을의 무사와 평안을 기원하곤 했다. 당제에는 당연히 굿판이 따르는 법, 정월 한 달 동안 고샅 구석구석마다 농악소리가 끊이지 않았었다. 그래서일까. 개발 직전 이곳에서 발견된 장고가 현존하는 장고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곳에는 ‘장구촌’이란 마을이 있고 학명이 ‘전방후원분’인 고분을 ‘장고분’이라 부르기도 한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헐어버려야 할 예쁜 한옥들이 아까워 발을 동동 구르는 내게 격자 창살에 아기 손바닥 크기의 유리가 붙은 봉창문을 뚝 떼어 주셨던 할아버지는 어디쯤에 계실까. 이승인지 저승인지 짐작만 할 뿐이지만 그 봉창문은 지금까지 우리 집 거실에서 옛 장구촌의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들려주고 있다. 때때로는 한겨울 된바람이라도 맞은 듯 문풍지를 바르르 떨며 내 등을 떠밀어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