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4월 1일 옥에서 풀려나와 백의종군 길에 올랐던 장군은 모진 고문과 옥살이로 만신창이가 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왜군의 추격을 따돌리며 8월 9일 벌교에 도착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됐지만 군관 9명, 군사 6명만이 장군을 따르고 있었다. 장군이 보성에 들어오자 수많은 장정들이 장군을 환영하며 자원입대했다. 장군은 조성면 우천리(고내마을)의 조양창(兆陽倉)으로 가서 군량미를 확보한 다음 군민들의 도움을 받아 포구로 옮겼다가 8월 12일 10척의 향선(鄕船)에 실어 진도로 이송했다.
장군은 8월 15일 ‘칠천량해전에서 패한 결과로 해전이 불가능할 경우 육지에 올라 도원수를 돕는 것도 가하다’(‘수군을 폐지하라’는 취지이다)는 선조의 8월 7일자 유지를 선전관 박천봉으로부터 받았다. 선조는 당시 궤멸된 수군의 재기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이러한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장군은 보성군청 무기고에 보관돼 있던 무기를 점검한 다음 네 마리 말에 나눠 싣게 했다. 이렇게 보성에서 확보한 병력, 군량미와 무기 등으로 왜군에게 타격을 가하고 해상주도권을 다시 확보할 수 있다고 장군은 판단했다. 그리하여, 수군을 폐지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선조에게 저 유명한 ‘금신전함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장계를 올렸던 것이다. 보성군청 앞에 있던 열선루에서, 선조도 뒤늦게 장군의 판단을 존중해줄 수밖에 없었다.
◇133척 왜선 격파
1597년 9월 16일 왜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대장선에 타고 선두에 선 장군은 후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웠다. 남장을 한 여인네들은 ‘강강술래’를 부르며 옥매산 허리를 빙빙 돌면서 제독과 조선 수군을 응원했고, 전선으로 위장한 수백 척의 어선들도 멀리서 세를 과시했다. 장군을 믿고 따르는 민과 군이 혼연일체가 된 것이다. 마침 북서류하던 해류도 남동류로 바뀌어 조선 수군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조선 수군은 총통과 불화살을 쏘아대며 방향이 바뀌는 조류를 이용해 적선을 공격함으로써 적선 31척을 격파하고 수많은 왜적을 바닷속으로 사라지게 했다. 나머지 왜선들은 먼바다로 퇴각했다.
장군은 고작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친 기적과도 같은 전과를 거뒀다. 왜선은 31척이 격파되고 나머지는 퇴각한 반면, 조선 수군은 단 1척도 훼손되지 않았다. 세계 해전사에 유례가 없는 대승이었다. 이것이 바로 명량대첩이다. 이 승리로 정유재란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장군이 있는 한, 왜군으로서는 서해를 통한 해상보급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왜군에게 장군은 가히 ‘바다의 신’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수륙병진 작전으로 북상하려던 왜의 육군 또한 남쪽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왜군은 그 분풀이로 장군의 아산 본가에 쳐들어가 마을을 불태웠다. 이때 장군의 셋째 아들 면이 전사했다.
◇이순신 장군과 보성의 인연
그런데, 장군은 정유재란의 위중한 시기에 왜 보성에 계셨던 것일까. 장군은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 명보극장 근처인 건천동에서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에 태어났다.
그 동네에는 3년 먼저 태어난 류성룡이 살고 있었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면서 선조 때 영의정으로서 임진왜란의 일등공신이었던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어린 시절의 장군에 관해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아하고 기풍이 있으며,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가는 선비와 같고, 뱃속에는 담력이 있으며, 아이들과 전쟁놀이하기를 좋아했다’고 평가했다.
장군의 선조들은 고려 때부터 문반으로서 고위직을 역임했다. 특히, 5대조 이변은 세종 1년(1419년) 증광시에 급제한 뒤 정2품 대제학과 정1품 영중추부사까지 올랐고, 증조부 이거는 성종 11년(1480년)에 과거에 급제한 뒤 정5품 이조정랑과 정3품 병조참의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조부 이백록이 조광조 등 개혁파들과 뜻을 함께 하다가 기묘사화에 연루돼 죽임을 당했다. 부친 이정은 관직을 외면한 채 무명의 선비로 지내다가 처가인 충남 아산으로 이사했다. 장군의 모친 초계 변씨는 아산 지역의 명문가 변수림의 딸이다.
임진왜란의 전초전격인 을묘왜란(1555년) 때 왜구에 의해 전라도 일원이 함락됐을 당시 전라도순찰사 이준경이 나주목에서 진압작전을 지휘했는데, 명사수들이 차출됐다. 그때 보성군수 방진이 가장 먼저 달려와 왜구 진압에 공헌했다. 이준경은 1559년 조광조의 문인으로서 과거시험 1년 후배인 장군의 조부 이백록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글을 읽고 있던 15세 소년을 눈여겨보았다. 이후 1565년 이준경의 집에 방진이 찾아와 외동딸 방태평(방수진이라고도 불렸다)의 중매를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장군은 21세이던 1565년 8월에 이준경의 중매로 방진의 외동딸과 결혼해 상주 방씨의 사위가 됐다.
그 후 장군은 궁술과 병학에 일가견이 있던 무관 방진의 후원으로 손자, 오자 등의 병법과 말타기, 궁술, 창검 등을 익히면서 무과에 응시할 준비를 했다. 당시 장군은 그전에 이미 문과에 관한 소양도 상당한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보성군청 앞 열선루 나들이 길에 동갑인 전방삭을 알게 됐고, 선거이, 안중묵, 최대성, 황대중, 정회 등과도 가깝게 지냈다. 장군은 28세이던 1572년(선조 5년) 8월 무과인 훈련원 별과에 처음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낙마해 왼쪽 다리가 부러졌는데, 한 발로 일어나 버들가지의 껍질을 벗겨 상처를 싸매고 다시 말에 올라 끝까지 달렸지만 고배를 마셨다.
4년 뒤 32세이던 1576년(선조 9년) 2월 식년무과에 다시 응시, 병과에서 28명 가운데 12등으로 합격했다. 장군은 이렇게 보성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고, 그 인연으로 정유재란의 위중한 시기에 보성에 계셨다.
◇보성사람들 이순신 장군 구명활동과 지원
장군이 억울하게 옥에 갇히고 백의종군하자 보성에서는 전방삭이 장군의 구명활동과 의병모집을 위해 나섰다. 방덕룡을 비롯해 처가 방씨 가문의 일가친척들도 나섰고, 변홍제와 회천면 봉강리 모원마을에 있던 외가 변씨 가문의 일가친척들도 모였다.
정경영, 정명열, 마하수, 백진남, 문위세, 문영개, 임계영, 정사제, 소상진 등도 장군을 도왔다. 수많은 장정들이 자원입대했다. 군량미와 무기도 보성에서 마련했다. 보성은 명량대첩과 정유재란 승리의 발판이 된 ‘비밀기지’였다.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
장군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신성인의 자세로 나라를 구하고도 억울하게 파직되고 하옥돼 모진 고문까지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척밖에 남지 않은 전력으로 명량에서 다시 왜적을 격파했다. 그야말로 ‘바다의 신’이자 ‘성인’ 겸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성웅은 당대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했고, 사후에는 그 정신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웠다.
성웅이 저 유명한 장계를 올렸던 ‘열선루’는 왜적에 의해 불타버렸다가 1610년 보성군수 이직에 의해 ‘열선정’으로 고쳐 중건됐다고 하나, 1871년 간행된 호남읍지에는 ‘터만 남아있다’고 기록돼 있다. 지금, 이 ‘열선루’가 복원 중이다. 2021년 완공을 목표로 현재 보성읍 신흥동산 일대에서 공사가 한창이다. 연못과 읍성 둘레길도 만들고 있다. 참으로 뜻깊은 일이다.
지금의 한일관계와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정세는 마치 구한말과도 같은 상황이라는 의견이 많다. 성웅이 보성에 남긴 소중한 발자취인 ‘수군재건로’에 대한 세심한 고증이 필요하다. 후손들이 그 발자취를 찾아 걸으면서 지극한 충성심, 살신성인의 자세, 숭고한 인격, 투철한 사명감, 철저한 사전 준비성, 탁월한 지략 등 성웅 이순신 장군의 숭고한 정신과 자세를 되새기고 계승하는 소중한 계기를 가질 수 있는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이 돼야 한다는 게 지역민들의 한결같은 주장이자 바람이다. 보성의 자긍심, ‘열선루’와 ‘수군재건로’가 눈앞에 와 있다. <끝>
/동부취재본부=김근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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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 ‘금신전선 상유십이’ 수군재건로 조형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