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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김향남(수필가·문학박사)

2020. 09.02. 11:12:57

마실 가듯 성산(담양군 지실 부근)으로 간다. 그곳은 나의 별장이다. 자그마치 열 채도 넘는다. 식영정, 서하당, 소쇄원, 환벽당, 명옥헌, 송강정, 면앙정, 풍암정…. 이 범상치 않은 단어들이 내 별장의 이름들이다. 내키는 대로 나는 이집 저집을 순회한다. 세상에 땅 한 뙈기 갖지 못한 내가 이렇게나 호사를 누리다니 암만 생각해도 과분하다 싶지만, 어느 구석인가는 나도 이쁜 데가 있었나 보다. 햇살 그윽한 마루에 앉아 바람 소리, 새 소리를 슬카장 듣노라면 그 순간만큼은 누구도 부럽지 않다.

오늘은 서하당(棲霞堂)이다. 노을이 깃드는 집이라니 이름만으로도 정감이 넘친다. 나는 먼저 식영정에 오른다. 서하당엔 잠깐 눈인사만 해두고 식영정 마루에 앉아 솔바람부터 쐰다. 높은 누대에 걸터앉으면 솔숲 너머로 물빛은 잔잔하고 바람은 청아하다. 건너편 산마루엔 구름이 인다. 나는 한참을 앉아 있다. 기둥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아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여긴 나만의 공간이기는 어렵겠다. 이곳은 늘 먼저 온 사람들의 차지거나 잇따른 방문객들 때문에 호젓할 수가 없다. 나는 서하당으로 내려간다.

서하당은 그윽하다. 위쪽(식영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홀대당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덕분에 나는 좋다. 낮고 한갓진 이곳엔 자잘한 미물들이 모여 산다. 거미는 줄을 치고 나방은 줄을 탄다. 앵앵대는 모기도, 먼지만 한 날것들도 제집처럼 날고뛴다. 나는 이 넓은 뜰을 죄다 차지하고서 송강(松江)이 그랬듯이 “산옹(山翁)의 이 부귀(富貴)를 남들에게 소문내지 마오“ 흐뭇하게 읊조린다.

뜰에는 햇살과 바람과 고요만 있다. 나는 마루에 앉아 햇볕을 쬔다. 부드럽고 따스한 기운이 내 등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문득 레오 리오니의 동화 ‘프레드릭’이 생각난다. 들쥐 ‘프레드릭’은 다른 친구들이 부지런히 먹이를 모으느라 쉬지 않고 일을 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게으름만 부린다. 친구들이 나무라듯이, “너는 왜 일을 안 하니?” “지금은 뭐해?” “너 꿈꾸고 있지?” 하고 물으면, “으응, 나도 일하고 있어. 난 춥고 어두운 겨울날을 위해 햇살을 모으는 중이야.” “지금은 색깔을 모으는 중이야. 겨울엔 온통 잿빛이잖아.” “난 지금 이야기를 모으고 있어. 기나긴 겨울엔 얘깃거리가 동이 나잖아”라고 말할 뿐이다.

겨울이 되자 먹을 것 넉넉한 친구들은 바보 같은 여우 이야기와 어리석은 고양이 얘기를 하며 행복하게 지낸다. 하지만 낟알들도 떨어지고 옥수수 역시 아스라한 추억이 되어 버렸을 땐 누구 하나 재잘거리지도 않는다. 이윽고 얘깃거리마저 동이 나고 말았을 때, 그때 친구들은 ‘프레드릭’을 생각한다.

“네 양식들은 어떻게 되었니, 프레드릭?

그러자 ‘프레드릭’은 커다란 돌 위로 올라가 그동안 모아두었던 금빛 햇살을, 붉은 양귀비꽃과 초록빛 딸기 덤불을, 구수한 이야기를 꺼내 친구들에게 들려준다. 얼었던 몸이 따스해지고 마음속 색깔들이 또렷해지면서 친구들은 박수를 치며 감탄한다.

“프레드릭, 넌 시인이야!”

나도 가만히 햇살을 만져본다. 내가 마치 ‘프레드릭’이라도 되는 듯이…. 몸이 따스하다.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이 온기를 누군가와 나누고도 싶어진다. 내가 모은 것들을 가만가만 얘기해보고 싶기도 하다. 도무지 가망이 없다고 팽개치고 나왔던 것들을 다시 붙들고 싶어진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들, 쓸데없는 짓이라고 자조하고 한탄했던 일이 새삼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진다. 짜증스럽고 심란하던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도 같다. 이 햇살 속에는 확실히 뭔가가 있나 보다. 아니면 내 안에도 ‘프레드릭’ 한 마리 깃들어 살거나….

내 고무된 마음을 눈치챘는지 새 한 마리가 비상한다. 여기저기서 화답송이 퍼지고 고요한 뜨락에 일순 소요가 인다. 어둠이 무리 지어 올 때까지 저 새들과도 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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