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날, 뜬금없이 빛의 근원지가 남쪽일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지냈다. 고향마을 동쪽은 큰 산이 있어서 바깥세상을 생각하기엔 까마득했고, 서쪽은 숲과 초원이 펼쳐져 해거름이면 소들에게 풀을 뜯기며 노을을 보던 곳이었다. 공동묘지가 있는 북쪽은 초상이 날 때마다 슬픈 상엿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날씨가 궂은 날이면 도깨비를 만났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뒷집 인수가 헤엄을 치다가 저수지에 빠져 죽던 날도, 섭이 할머니의 혼불이 나갔다고 동네가 떠들썩한 날도 북쪽에서는 흉물스런 까마귀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무섭기만 한 것들이 모두 북쪽에 있는 이유가 밝은 빛이 없어서라는 생각은 자라면서 점점 신념이 되어 굳어만 갔다. 그럴 때마다 양지쪽 흙담에 기대어 유일하게 신작로가 나 있는 남쪽을 바라보곤 했다. 부푼 꿈을 안고 도회지로 떠나는 사람들도 그 신작로를 따라 떠났고, 꿈을 실현해 금의환향하는 사람들도 역시 그 신작로를 따라 눈부시게 들어왔다.

어느 날 서울에 다니러 가셨던 아버지께서도 어김없이 볕이 따스한 그 신작로를 따라 돌아오셨다. 서둘러 평소 궁금하게 여겼던 질문부터 했다. 아버지의 대답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없는 것이 없고 눈을 뜰 수조차 없이 화려하다는 서울이 공동묘지가 있는 북쪽에 있다는 말은 정말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서울로 가는 길은 분명 남쪽으로 난 신작로라는 믿음은 확고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좀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를 시켜보자는 어른들의 뜻으로 고등학생인 고모를 따라 남쪽에 있는 이웃 읍으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드디어 신작로를 따라 길을 떠나게 되었다는 설렘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뭉게구름이 유난히 많은 남쪽 읍내에는 신기하고 재미난 일들이 넘쳐날 것만 같았다.

기대와는 달리 대학 입시 준비에 바쁜 고모는 늘 늦은 시간에 돌아왔고, 어린아이가 혼자서 지키는 쓸쓸한 자취방은 밝은 빛의 남쪽만이 결코 아님을 알았다. 오히려 북쪽에 있는 고향을 바라보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찬란한 빛이 눈물 속에서 빛나곤 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학교다 직장이다 해서 도회지를 떠돌면서부터는 따스한 빛이 있는 남쪽은 항상 고향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무엇에 끌린 듯이 도시의 끝 고향으로 가는 길목에 둥지를 틀고 옛 선인들이 읊었던 귀거래사의 의미를 가슴 가득 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결혼의 연륜이 깊어갈수록 고향은 자꾸만 객이 묵어가는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우리 한국의 딸들이 겪는 공통적인 정서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기도 했다. 어릴 적에 늘 동경했던 빛과 꿈이 있는 남쪽이 바로 고향이라고 여겼던 믿음이 다시 흔들리는 소리에 견딜 수가 없었다. 이사를 할 때마다 신앙처럼 줄곧 남향집을 고집하며 창 앞에 머무는 것으로는 마음의 출렁거림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온화하고 밝은 곳, 어릴 적 뛰어놀던 앞동산 같은 곳, 음산하게 울던 까마귀가 아니라 동박새, 소쩍새, 뻐꾸기, 종다리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래하는 곳, 별빛과 달빛이 방안까지 넘나드는 곳, 동녘에 솟는 햇살이 눈부시고, 산자락에 깃드는 노을이 아름다운 곳, 그곳이 어디쯤일까 평생을 품고 살았다.

‘이상향’, 이상향이었다. 마음 안에서 살고 있는 동네. 어리석게도 60이 되어서야 자나 깨나 함께했던 그 동네를 알아차렸다. 요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을 향해 해바라기 하는 시간을 갖는다. 도시 안의 작은 마당이지만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내는 신비한 흙을 만지면서 마음속 동네에 한가득 따스한 빛을 심는다.

그 동네로 향하는 길이 더욱 환해지도록 예쁜 등불을 하나씩 둘씩 마련하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