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 고향엔 맑고 순후한 시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연과 사람들을 사랑했고, 솟구치는 정열을 온몸으로 노래했습니다. 켜켜이 쌓이고 쌓인 한(恨)이 사무쳐 광인(狂人)의 몸이 되었지만 그들의 가슴은 늘 따뜻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심심풀이 삼아 놀리면서도 함께 어우러져 살았고 이웃으로 인정했습니다.

무수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세월만큼이나 세상은 많이도 변했고요. 신문의 사회면을 펼치기마저 두려워지는 요즈음, 문득문득 그들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눈과 귀를 가려버리고 싶도록 주변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어느새 그들의 가슴에서 흐르던 강물이 되어 굽이굽이 휘돌아 갑니다.



Ⅰ.

열아홉 나던 봄. 초례청에서 원삼 소맷자락 사이로 남편의 얼굴을 훔쳐본 순간부터 내 가슴에는 숙명적인 해를 하나 품어 안았습니다. 꽃잎 같은 떨림으로 정을 나눈 지 석 달 만에 남편은 애틋한 눈길 한번 던져주고는 군복에 감싸여 사라져갔습니다.

수없이 해가 지고 해가 떴습니다. 한 번도, 한순간도 품어 안은 태양은 기울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점점 거센 불길이 되어 가슴에서 머리로 아니 온몸으로 타올랐습니다. 그럴 때마다 불덩이를 꼭 끌어안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종종걸음치곤 했습니다. 첫차가 들어오기 전에 도착해야 합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15년이 넘게 정류장을 지켰습니다.

가지각색 풀꽃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저고리 끝동에도 새색시 적 다홍치마 닮은 고운 천을 주렁주렁 달아 한껏 모양을 부렸습니다. 운이 좋은 날엔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더러 만날 수가 있습니다. 남편도 그들 틈에 끼어 불쑥 얼굴을 내밀 것만 같아 숨을 쉴 수조차 없을 만큼 가슴이 두근거리는 나날이었습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 허탈한 어둠이 몰려오면 나도 모르게 입에서는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Ⅱ.

아침 여섯 시에 잠에서 깼습니다. 차림새를 가다듬고 읍사무소로 달려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습니다. 나라가 없이는 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렵게 구한 소형 태극기는 왼쪽 가슴에 단정히 붙였습니다.

날마다 해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온 거리를 헤매며 쓰레기를 줍는 것도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입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학교 뜰에서 도시락을 먹는 학생들에게 혼식 지도도 해야 하고, 영혼까지 맑게 울리는 시(詩)도 읊어주어야 합니다. 어린 학생들에게는 마음을 살찌울 수 있는 예술을 많이 접하게 해야 합니다. 학교 선생님들도 이런 생각이 통했는지 내 행동에 대해 묵인해주고 있습니다.

시인이 되고 싶던 내게 법학사전을 진절머리 나게 들려주던 아버지였습니다. 내 머릿속엔 벌레들이 우글거리기 시작했고 끝내는 정신을 조각조각 갉아먹었습니다.

나는 어린 학생들의 정신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바람의 속삭임과 새들의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게 해야 합니다. 구름이 흘러가는 곳에서 희망의 무지개를 보게 하고, 전설 같은 풀꽃들의 이야기도 들려주어야 합니다. 가을날 푸른 하늘 같은 아이들의 눈망울을 바라보면 마음 가득 맑은 샘물이 차오르는 것만 같습니다.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우르르 교실로 들어가 버리면 나만을 위한 노래를 읊으면서 귀가합니다. 보들레르의 ‘하루의 끝’ 중 내 맘에 꼭 드는 구절을 말입니다.

“시인은 중얼거린다. 드디어/ 내 정신은 내 등뼈와 같이/ 열렬히 휴식을 빈다./ 가슴엔 서글픈 꿈을 안고서/ 나는 번듯이 드러누련다./ 네 장막 속을 굴러가련다./ 오 시원한 어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