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속(永續)을 위하여
에세이

영속(永續)을 위하여

탁현수 수필가·문학박사

탁현수
드라이브를 핑계 삼아 강변을 헤매고 있다. 희붐하게 피어오르는 봄날의 물안개를 헤치며 꿈결인 듯 달린다. 하늘과 빛이 닫혀있던 태고의 원시가 바로 이러했을까.

문득, 어느 때인가 극락강가에서 보았던 선돌(立石) 한 쌍이 떠올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강을 사이에 둔 두 마을의 소통 언어로 음(陰)과 양(陽)의 기운을 원활하게 조율하고자 해서 세웠던 염원의 바위. 인간의 정신 영역까지도 기계들이 장악하고 있는 요즈음 세상에서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한때 그 선돌은 절실한 소망을 담아 세운 선인들의 신앙 자체였다. 자연의 이치와 기운을 천명으로 여기며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을 위한 자연과의 조심스러운 협상 행위였다고나 할까.

인간으로부터 영원불변한 것으로 인식되는 돌. 그중에서도 인간 힘의 한계를 극복하게 했던 거석(巨石)은 선사시대부터 숭배의 대상물이었다. 삶은 세월과 역사의 길을 따라 흔적을 남기며 유원히 흐른다. 인간이 거석을 이용해 무덤과 선돌을 만들고 탑을 세웠던 것은 바로, 영생(永生)을 위한 기원의 상징물로 합당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영생은 죽지 않음이 아니라 생(生)과 사(死)의 무한한 교체 과정이 조화롭게 펼쳐지기를, 또는 단절의 고난 없이 영속하기를 염원하는 절실함의 표징이기도 했다.

때마침 강 주변 우측에 ‘입석마을’이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마을 안길을 향해 접어들자마자 버티고 서있는 선돌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한눈에 보아도 남성을 상징하는 모습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등산, 용진산, 복룡산 등이 병풍처럼 빙 둘러있어서 황량하고 드넓은 들판이 아니라 아늑한 모태의 자궁 속에라도 들어앉은 듯하다. 이래서 남성의 양기(陽氣)를 굳이 이 큰 돌을 세워서라도 보충해야만 했을까. 세상은 남자와 여자, 즉 음과 양으로 반반 나뉘어있다. 그 두 성(性)이 조화로움을 이룰 때에 비로소 완전체가 된다. 조화는 관계의 평화를 의미한다. 형평을 벗어나거나 기우는 관계는 불협화음을 유발함은 물론, 결국 단절이라는 끝을 향하는 길목이 되고 만다.

음양의 조화가 세상의 조화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남성과 여성을 상징하는 선돌을 세우는 일은 간절하고 지엄한 종교적 의식이었으며, 거친 자연과 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가야 하는 삶의 위급한 수단이기도 했다. 선돌의 기능 역시 풍요와 번식[多産]은 물론이고 수호나 벽사적 역할이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어디 인간에게만 국한하는 일이겠는가. 풍요와 왕성한 번식은 만물의 기본적 욕구이며 영속의 필수 조건이다.

기나긴 세월에 끌려오느라, 현대인들의 외면을 견뎌오느라 초췌하기 이를 데 없는 ‘선돌’의 모습을 뒤로하고 나오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물재 만을 좇아 사는 사람들 일색인 세상에 자연과의 소통 따위가 안중에나 있겠는가.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이 없는 시대에 그까짓 바위 하나에 인간의 운명을 맡긴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 물어도 웃음거리일 뿐이다. 하지만 선돌은 영원히 서 있는 돌이다. 서 있다는 것은 현재 진행형이며 생명을 가졌다는 증거이다.

선돌을 향해 염원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세상의 분쟁이 줄고 조화로운 평화를 이룰 것이라고 믿었던 선인들의 생각에 기꺼이 화답을 보낸다. 자연의 이치에 합당하게 따르면서 살겠다는 인간 본연의 고해가 선돌에는 위선 없이 담겨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선돌의 영원을, 아니 인간의 영속과 평화를 두 손 합장하고 간절하게 기원해 보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인 듯 그저 허허롭기만 하다.

눈앞에 수굿하게 앉아있는 어등산의 뒷모습이 유난히 쓸쓸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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