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
1792년 김효일(金孝一)·기학경(奇學敬)이 편찬한 ‘광산지(光山誌)’‘인물(人物)-재학(才學)편’에 보면 “김문발(金文發)은 문정공 김태현(金台鉉)의 7대손으로, 세종 때 은일(隱逸)로서 형조참판, 황해감사를 지냈으며, 이른 나이에 은퇴해 원림과 연못을 만들고 부용정이라고 편액했다.
여기에서 향인들과 더불어 남전(藍田)의 제도와 백록(白鹿)의 학규를 행해서 풍교를 장려했으니, 광주의 향약이 이로부터 시작됐다”는 기록이 있다. 즉 김문발이 부용정에서 향약을 실시했다는 사실의 첫 기록인 것이다.
이후 1816년 3월과 4월에는 김문발의 후손인 김만직(金萬稷, 1738~1819)이 아들이나 조카 또는 손자들과 함께 광주목사에게 올린 소지가 있는데, “저희들의 선조께서는 세종 때의 유현(儒賢)으로서, 학문이 고명해 은일로서 벼슬에 나아가 관직이 2품에 이르렀지만, 벼슬길에 뜻이 없어 만년에 물러나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부용’으로 편액을 달았는데, 대개 주렴계의 ‘애련(愛蓮)’의 뜻을 취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씨향약’과 ‘백록동강규’를 설치해 봄과 가을에 강론하고 연마해 광주의 영원한 규범을 이루었습니다. 그리해 세상에 드문 큰 유학자와 선비들이 감모하는 마음을 성대하게 일으키니, 360개 고을 중에서 최고가 됐습니다”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즉 이미 광주향약이 최고였음을 드러낸 말이다.
김문발(金文發, 1358~1418)의 호는 부용(芙蓉),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김거안(金巨安)의 아들로 평장동에서 태어났는데, 말년에 칠석동으로 옮겨와 부용정을 짓고 여기에서 향약을 시행했다고 한다. 그러니 김문발이 향약을 실시한 시기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1418년을 넘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현재 남아있는 태인의 고현동 향약이 1475년에 시행됐으니, 그보다 더 일찍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 실시한 향약의 내용이나 조목 등이 남아있지 않아서 광주향약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시행됐다는 주장을 강하게 하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다만 그때 향약을 시행했던 부용정은 지금까지 잘 남아있다.
◇전개
향약의 조목이 남아있는 것은 필문 이선제에 가서야 가능했다. 이선제(李先齊, 1390~1453)의 자는 가보(家父), 호는 필문(필門),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아버지 이일영(李日英)과 어머니 초계인 정윤길(鄭允吉)의 딸 사이에 대촌에서 태어나 양촌 권근(權近)과 그 아우 매헌 권우(權遇) 두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1419년 진사로서 증광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예문관제학에 이르렀다. 그는 집현전 학사로 재임하며 ‘고려사’와 ‘태종실록’ 및 ‘신농본초’ 편찬에 참여하는 등 큰 행적을 남겼다.
이선제가 향약을 시행했다는 기록은 ‘수암지(秀巖誌)’의 ‘필문선생일고(畢門先生逸稿)’ 내의 ‘광주향약(光州鄕約) 조목(條目)’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여기에 “경태(景泰) 2년 신미년(1451)은 우리 문종(文宗) 원년이다. 선생께서는 우리 고을의 현감 안철석(安哲石)과 함께 임금께 상소해 현(縣)을 주(州)로 승격시켰다. 이로 인해 희경당(喜慶堂)을 창립했고, 고을의 선비들 중에 문장과 덕행을 갖추고 문벌(門閥)이 현저한 자 90명을 가려 뽑아 별도의 장부에 기록해 비치하고서 향강(鄕綱)을 바로잡고 또한 향약을 시행했다”는 내용이 있으며, 뒤이어 향약의 조목을 적은 것이 있다.
향약의 조목은 ‘부모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 형제가 서로 다투는 자, 가정의 법도를 어그러뜨린 자’ 등을 시작으로 해 벌목(罰目)을 3등급으로 구분한 것이다.
이 벌목은 다른 지역의 향약에서도 널리 통용되는 내용이다. 즉 상등의 벌에 해당한 자는 집강이 관아에 아뢰어 법률대로 단죄(斷罪)하도록 했고, 증등의 벌에 해당한 자는 집강이 동중에 글을 띄우고 향사당(鄕社堂)에 함께 모여서 벌을 주기로 했으며, 하등의 벌에 해당한 자는 그 자리에서 면책(面責)하는 벌을 주기로 한 것이다.
◇변천사
이선제가 중심이 돼 실시한 향약은 김문발이 시행한 때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이고, 그후 광주 양과동정 향약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모두 인근지역에 해당된다.
16세기에 접어들면서 광주향약은 동약(洞約)의 형태로 발달해 각지에서 시행됐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 남은 자료는 이선제의 광주향약 실시 이후 약 100년 지나서 나타난 회재 박광옥의 선도면(船道面, 현재 광주 서구 매월동 부근) 향약이 있을 뿐이다. 이것도 실체는 남아있지 않고 다만 동약(洞約)을 실시하면서 작성한 서문만 그의 문집 속에 남아있다.
즉 ‘회재유집(懷齋遺集)’의 ‘선도향약 서문’에는 “땅이 척박하고 물 아래인 것으로 인해 가물고 넘치는 것이 모두 재해가 됐으니, 부자는 쉽게 가난해지고 가난한 자는 쉽게 방랑하게 됐다. 수십 년 이래로 마을은 쓸쓸해져서 보전하고 있는 사람은 몇 필부(匹夫)밖에 없으니, 늦게 태어난 사람으로서 어찌 항상심을 잃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난리통으로 인해 예속으로 서로 사귀는 것을 볼 수 없게 됨에 구차스럽게 나쁜 풍속을 뒤따르며 이웃과 좋은 관계를 돈독히 하지 못하니, 가정은 숭상함을 달리하고 사람은 마음을 달리하며 사유(四維, 예의염치)를 베풀지 못하게 됐다”고 쓰여있다. 이것이 동약이 세워진 까닭이다. 향약의 조목은 ‘백록동서원학규(白鹿洞書院學規)’를 상고하고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참조했으며, 아울러 여러 사람의 논의를 두루 취해 왼쪽에 조목을 나열했다. “봄가을로 강신(講信)함에 고을 사람들 상하가 모두 모여서 부지런한 자는 포상하고 태만한 자는 처벌하며, 모두가 더불어 유신(維新)해 오래도록 실추되지 않게 할 것이니, 어찌 모두가 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작성 일시는 1555년 11월 16일이다.
◇시행
박광옥(朴光玉, 1526~1593)의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 본관은 음성으로, 박자회(朴子回)의 손자이자, 박곤(朴鯤)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0세 때 정황(丁潢)의 문하에 들어갔고, 1546년에 식년시에서 진사·생원과에 동시 합격했으며, 1560년에는 목사 유경심(柳景深)을 도와 향교를 중수하고 학헌(學憲)·학규(學規)를 제정했다.
1574년에는 문과에 급제해 영광 군수 등을 지냈으며, 정여립(鄭汝立)의 옥사 때 물러났다가 임진왜란 때 같은 고장의 고경명(高敬命)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향약의 실시는 그가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0년 뒤인 것으로, 그 이후로도 광주향교의 학규를 제정하기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가 남긴 향약의 규약이나 조목은 남아있지 않지만, 김문발처럼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와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참조해서 만들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박광옥의 향약 시행 사실은 다른 자료에서 더 잘 보이니, 즉 남원의 원동향약 자료 중 ‘1885년 원천동향약안(源泉洞鄕約案)’에서 노완수(盧琬壽)가 쓴 ‘동약중수서(洞約重修序)’ 등이 그것이다. 그 내용에는 ‘옛날 경진년(1580)에 광산(光山)의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이 중국에 가서 회암(晦菴)·남전(藍田) 두 분의 진상(眞像)을 구해서 돌아왔고, 그가 살던 곳인 선도동(船道洞)에 향약을 세우셨으며, 회재의 외예(外裔)인 환암(喚庵)·성암(醒庵) 형제분이 1638년에 두 진상을 원천동으로 옮김으로써 원천 향약이 대방(帶方, 남원)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다’는 사실이 들어있다.
이를 통해서 박광옥은 선도면에 향약을 설치하고, 그 후 중국에 갔을 때 진영을 구해와서 선도향약을 더 발전시켰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아들이 없던 관계로 그의 업적은 그후 오랫동안 묻히게 된 것이다.
사실 퇴계 이황이 만든 예안향약은 1556년에 만든 것이고, 율곡 이이가 만든 서원향약과 해주향약은 1571년과 1577년에 만든 것이다. 이런 사실과 비교했을 때 광주에서는 이미 향약이 매우 보편적으로 시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활발히 시행되던 향약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대부분 사라지게 됐고, 그중 양과동정 향약만이 전란을 극복하고 1604년에 다시 복구를 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권수용 한국학호남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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