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 화분을 옮기다가 넘어져 몸에 가시가 박힌다. 몸에 뿌리를 내리는 사막의 뼈가 날카롭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속내를 바람벽에 적기 위해 가시연필을 예리하게 깎아 한 자 한 자 쓰고 있었던 것일까. 가시가 빠지지 않는다. 도망치듯 사막을 떠난 뼈가 잡힐 듯 말 듯 숨어 있다. 함부로 들여다볼 수 없는 그 은밀한 내막 때문에 몸이 따끔따끔하다. 그 옛날 짝사랑의 가시 박힌 기억이 꽃빛 통증으로 일어서고 있다.

대학 시절에 나는 교회 연극반에서 연출을 담당했다. 행사 때마다 재미있는 단막극을 무대에 올렸다. 그때마다 곁에서 음악을 담당해 준 여대생이 있었다. 그녀는 교대생이었고 나는 전남대 국문학과생이었다. 학교는 달랐지만 그녀를 보기 위해 멀리 교대까지 가서 성경 공부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의 은빛 가시로 무장한 선인장처럼 곁을 내주지 않았다. 짝사랑으로 핀 꽃, 그 달달함이 입속에서 뛰어놀고 있었지만 입술의 경계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한 짝사랑은 잘 벼린 칼과 같아서 수없이 내 마음을 베었다. 그 이상야릇한 칼은 스스로 주눅이 들어 칼집 속으로 들어가 새파랗게 녹슬어 갔다. 밤이면 웅크리다가 일어서다가 엉키는 칼끝에 찔려, 차가운 쇳소리를 내며 아파했다. 그렇게 여러 계절이 흘러갔지만, 그녀에게 다가가지도 못한 채 갈라지는 칼끝에서 달달한 꽃은 피었다가 졌다.

하루는 그녀가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아 장흥으로 떠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음이 바빠졌다. 한 번도 사랑 고백을 한 적이 없던 나는 어떻게든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교대 교정으로 가봤지만 그녀는 없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녀에게 바치는 짝사랑의 온도로 노릇노릇 익어 가는 오늘을 굽고 싶었다. 고백으로 말랑말랑한 오후를 노을빛 화덕에 올려놓고 온몸 가득 고소한 내음에 묻히게 하고, 올록볼록 먹음직스런 부끄러움이 갈색으로 익어 가게 하고 싶었다. 고백하지 못한 망설임들이 서로의 발뒤꿈치만 좇다가 허탕 치고 싶지 않아,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서 두 시간쯤 기다렸을까. 드디어 그녀가 나타났다, 여러 명의 낯선 목소리와 함께.

“야, 우리가 무섭냐, 그렇게 무서워? 우리랑 차 한 잔 하자는 게 그렇게도 싫어?”

“......”

“싫어? 이년이 보자 보자 하니깐...”

골목으로 몰려든 욕설이 그녀를 찍어 내렸다. 불길한 예감으로 짐승처럼 예민해진 저녁은 입을 닫았다. 겁먹은 나는 전봇대 뒤로 몸을 바짝 숨겼다. 내 안의 뜨거움이 날뛰는 욕설의 멱살을 움켜잡고 싶었지만, 끝내 거친 욕설의 총구(銃口)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날 나는 결국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온몸에 가시가 박힌 채로 푹푹 꺼지는 모래무덤, 그 밤을 걸어야 했다. 아름다운 그녀의 은빛 가시가 아닌 만개한 비겁함, 그 가시 때문에 나의 짝사랑은 서둘러 지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져 넘어져 있는 선인장 화분을 옮긴다, 따끔따끔 가시 박힌 짝사랑도 함께. 불운한 사막을 벗어나지 못한 흰 뼈가 몸에 새겨지고 있다. 며칠 동안은, 아니 평생 빠지지 않을 그 가시 때문에 아플 것이다. 그녀에게 다가가는 최초의 고백도 없이 스스로를 쥐어짠 비겁함으로 꽃빛 통증을 일으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