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 없이 여며두었던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창틀을 넘나들던 햇살을 따라 싱그러운 바람 한 자락이 와락 밀려든다. 온 집안이 소생의 소리로 출렁거린다. 탁자 위 난초 화분에서도 신비로운 생명의 기척이 있다.

지난겨울 폭설로 울음 터가 되어버린 시골집 마당이 떠오른다.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는 순간들이 계절마다 몇 번씩은 찾아오는데 그것은 꼭 바람의 기척 때문이었다. 품 안으로 파고드는 꽃샘추위도 아랑곳없이 빛과 생기를 실어 오는 우수와 경칩 무렵의 바람 냄새. 그 미풍의 일렁임은 마음을 뒤흔드는 신비의 마약이다.

먼 빛으로 보이는 산들이 잿빛의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다. 겹겹이 온갖 색을 품어 안고 햇빛과 내통하는 봄 산의 은밀한 모습. 봄이 짙어질수록 은성하게 피워내야 할 빛깔을 고르느라 궁리도 많아지겠지.

찢기고 부러져서 피 울음을 흘리고 있을 줄만 알았던 시골집 마당도 어느새 흔연한 얼굴로 새봄을 맞느라 분주하다. 홍매와 청매, 산수유, 목련, 개나리는 바빠 죽겠다는 표정으로 봉긋한 꽃망울들을 머금고 있고, 감나무, 은행나무, 석류나무, 단풍나무 가지에도 마디마디 새순을 피우기 위한 작은 잎자루를 매달고 있다.

폭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제 수형을 잃어버린 소나무의 동태를 눈여겨 살폈다. 날렵한 몸으로 대처하고 있다가 요염하게 햇살과 눈 맞추며 새순을 잉태하는 다른 나무들에 비해 확실히 둔탁하고 우직하다. 상황과 시류에 연연하지 않고 꿋꿋하게 제 모습을 지켜내는 일이 그토록 힘든 것일까. 부러진 상처마다 자생의 치유제인 송진이 가득 고여 있다.

휘청휘청 뿌리조차 뽑혀 나갈 듯 상처투성이로 살아가는 나무의 모습을 가슴 졸이며 지켜본 지난날이 있다. 나이 서른에 홀로된 조카는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어린 아들을 끌어안고 죽을 힘을 다해 기나긴 겨울을 보냈다. 그 혹독한 추위를 견디다 못해 어렵게 어렵게 새로운 연을 맺었지만, 어느 날 문득 두 가족이 한 가족이 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처가 덧날 때마다 타들어 가는 가슴을 접고 접어 뽑아낸 수액을 바르고 발라주며 옹이를 키워나가는 모습은 가히 눈물겨웠다. 그 가족의 상처가 하루빨리 아물어 파릇한 새순으로 피어나길 염원하며, 담 옆에 조용히 서 있는 소나무의 부러진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자신의 치부를 치유하기 위해 절실하게 노력한 적이 있었던가.

지닌 사연도 생긴 개성도 제각각이지만 하나같이 희망의 새순을 틔우는 일로 일념하고 있는 봄의 뜰에서 수많은 인간 군상을 본다. 지레 피는 것, 더디 피는 것, 펴보지도 못하고 오그라져 버린 것 등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과연 나는 봄을 맞는 이 뜰 안에서 어떤 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