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비운의 ‘전라도 천년사’
정진탄 논설위원


태양이 작열하는 올여름 내정 간섭처럼 여겨지는 싱하밍 주한중국 대사의 언행으로 정국이 뜨겁게 달궈진 때, 한 유명대학 청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싱 대사가 위안스카이로 비유되고 있어 위안스카이란 인물에 대해 역사적 설명을 부탁했다. 이 청년은 어릴 적 한국사 및 중국 역사 등에 해박함을 보여 역사박사로 통했다. 헌데 통화에서 뜻밖에도 위안스카이 물음에 우물쭈물했다. 한국어로 원세개, 청나라 때 인물이란 설명에서 그치고 역사적 맥락을 제대로 짚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 청년은 대학에 진학한 이후 관료를 꿈꾸며 행정법과 경제학 등에 매몰돼 오랜 기간 역사 같은 인문학 공부를 팽개치다시피 했다. 이런 류의 책을 읽을 시간도, 관심도 갖지 않게 된 것이다. 이 청년은 왜 이 시기에 위안스카이를 거론하는 것인지조차 몰랐다. 그가 처한 공부 상황을 일견 이해하면서도 씁쓸함을 떨치지 못했다.

고대사 ‘역사적 아킬레스건’

이런 씁쓸함은 실제 광주와 전남, 전북지역 관료에게도 향한다. 최근 이 지역에서 정율성 역사공원 조성으로 이념논쟁이 지속하는 가운데 이보다 훨씬 앞서 또 하나의 논쟁이 떠나지 않고 있다. 역사왜곡·식민사관 의혹이 제기된 역사서 ‘전라도 천년사’를 둘러싼 역사논쟁인데 편찬위원회 측과 시민사회단체가 충돌하고 있다. 편찬위 측는 원칙적으로 역사서를 정상적으로 발간, 배포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전라도오천년사바로잡기500만도민연대’와 바른역사시민연대 등은 폐기를 촉구하고 있다. 양측은 지방언론 등을 통해 릴레이 기고, 토론의 장에서 제기된 의혹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으나 해소는커녕 오히려 갈등을 키웠다.

역사서 제작 예산을 지원한 광주와 전남, 전북 3개 광역지자체는 이 같은 논쟁과 관련해 어떻게 해결할지 사실상 묵묵부답이다. ‘전라도 천년사’는 전라도 정명 1,000년을 맞아 2018~2022년 광주시 등 3개 지자체가 혈세 8억원씩 총 24억원을 투입, 전북연구원의 주관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당초 기획한 전라도 천년의 역사를 확장, 한국고대사를 포함한 오천년사까지 담으면서 5년 만에 34권 1만3,559쪽에 달하는 역사서가 나왔다. 제목은 ‘전라도 천년사’이지만 전라도 오천년사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3개 지자체와 편찬위 측은 봉정식과 함께 역사서를 발간, 배포하려했으나 역사왜곡과 식민사관 서술 의혹 및 논란으로 취소하거나 보류했다.

애초 역사 시기를 천년사에 한정했더라면 이처럼 문제가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역사적 해석이 극명하게 갈리는 고대사를 넣으면서 걷잡을 수 없이 파장이 커졌다. 물론 연대를 확장해서 전라도 역사를 짚으려한 의도는 굉장히 좋았으나 고대사 논쟁을 엄중히 인식했더라면 자제했어야 하거나 치열한 논쟁이 벌어질 경우를 대비해 미리 보정·보완하는 장치를 둬야 했다. 단군조선의 축소 또는 부인, 일본서기 사료 인용, 마한 멸망 시기, 식민사학 방법에 의한 지명 위치 비정 의혹 등을 놓고 편찬위와 시민사회단체의 시각이 첨예해 한국 전체 역사학계로 번졌다. ‘전라도 천년사’는 이처럼 역사적 아킬레스건을 건드려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3개 지자체는 예산만 지원하고 집필과 편찬은 역사학자와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면 역사적 인식에 대한 천박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공직자들은 오천년사가 나왔을 때 불어올 후폭풍을, 그러니까 고대사에 대한 역사적 논쟁을 조금이라도 앞서 인식했더라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논쟁의 역사서를 제작하고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해 1년 넘도록 결정을 못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역사에 대한 공직사회의 인식, 행정의 안일함이 매우 실망스럽다 하겠다.

편찬위 측은 여하튼 발간, 배포를 원하고 있고 시민사회단체와 지역 정치권 등에선 역사서를 배포하면 후세에 크나큰 오점을 남길 것이라며 폐기를 촉구하고 있다. 이 틈바구니에서 지자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다. 3개 지자체는 우선 사과부터 하는 게 순서일 것 같다. 아무리 집필과 편찬은 역사학자, 전문가들이 했다고 하나 예산을 주고 제작한 것은 지자체들인 만큼 추진 과정에서 보인 미숙함에 대해 지역민에게 사과하는 게 옳다.

지자체, 사과와 함께 결단을

주지하는 것처럼 논쟁이 되고 있는 역사서를 그대로 세상에 내놓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다. 편찬위 측과 시민사회단체 간 논란이 된 부분을 수정, 보완하거나 이를 별책부록 형태로 담는 방법이 있을 수 있고, 또는 아예 쟁점 대상을 제외시키고 배포하는 방법이 있겠지만 그러면 역사서의 기능이 사라질 것이다. 어느 쪽이든 양측이 수용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런데 역사적 팩트를 넘어 역사서의 기술 방식, 즉 사관이 문제란 지적이 제기된 만큼 해결책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3개 지자체는 기념비적인 역사서를 만들려다 전례 없는 곤혹한 처지에 놓이게 돼버렸다. 역사공부에 대한 비용과 비판을 혹독히 치렀다고 여기고 지원 예산을 매몰비용으로 취급하는 방안도 심각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 3개 지자체가 원만하고 유쾌하게 마무리할 방안은 없어 보인다. 이 같은 사태가 벌어진 것인데 대한 진솔한 사과와 함께 ‘전라도 천년사’ 운명에 대한 역사적 결단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