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4번 발간되는 광주 영화잡지 ‘씬1980’은 그 해 마지막 호에 편집위원들의 올해의 영화 Best 5를 선정한다. ‘씬1980’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는 나는 2024년 마지막 호인 19호에 올해의 영화 5편을 뽑았다. 생각해보니 올해는‘인디 봄’을 쓰기 위해 봤던 영화들이 있어 그나마 5편도 선정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오늘은 2024년을 정리하는 마음으로‘인디 봄’올해의 영화 Best 5를 선정해 보려 한다. ‘인디 봄’코너가 그리 인기 있을 리 없지만 혹시라도 오늘 우연히 이글을 보고 계실 수도 있는 독자와 연말에 집에서 무료함을 달래려 영화 한 편 보고 싶은 이들을 위해 ‘인디 봄’ 연말 결산을 해 봤다. 하하. 이 분위기 무슨 연말 시상식 같다.(영화는 개봉 순으로 엮음)
●진짜 대통령 ‘길 위에 김대중’
올해 1월에 개봉했던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 김대중’. 이번 달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비상계엄령과 탄핵 가결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고 나니 더욱 이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는 고 김대중 대통령의 탄생부터 1987년 대선 후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그리고 김대중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유신, 군사독재 등 한국의 현대사를 하나하나 되짚는다. 그리고 전 세계가 인정하는 김대중의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적 행보를 통해 파란만장했던 그의 일대기를 담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육성, 그리고 권노갑, 한화갑, 김옥두 등의 인터뷰와 당시의 영상들은 이를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던 김대중의 모습을 더욱 단단하게 뒷받침한다.
“내가 임금이 될 상인가.”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의 이정재 분이 했던 그 대사, 임금이 될 상, 대통령이 될 품성과 소양, 인격을 가진 사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던 영화, ‘길 위에 김대중’. 국민을 사랑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려 노력했던 대통령, 정치적인 이념을 떠나 그냥 봐도 좋을 영화이다. 특히 지금의 시기에는 더욱.
 |
|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장면. |
칸, 베를린, 베니스 세계 3대 영화제를 석권하면서 일본의 새로운 거장으로 꼽히고 있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이었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독특한 카메라 기법과 철학적인 소재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하마구치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냈다. 내러티브는 매우 단순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 장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대사가 많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이야기한다. 영화의 오프닝씬에서 약 4분간의 롱테이크로 보여주는 숲속 장면은 카메라를 틸트 업시켜 아래에서 위를 계속해서 올려다보며 마치 숲속을 걷는 듯하지만 어느 순간 나무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이중적 시선의 감각과 함께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내’가 보는 주체가 아닌 내가 보고 있는‘대상’이 나를 응시하는 카메라의 시점 또한 영화의 주요 포인트로 특히 영화를 보는 동안 자동차가 앞으로 나아가는 카메라 시선이 아닌 뒤로 가는 시선은 보는 주체를 전복시키며 마치 초자연적인 그 무엇으로 대변되는 또 다른 시선이 있음을 느끼게 했다.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지만 올해 손석구가 주연했던 짧은 단편영화 ‘밤낚시’와 같은 조금은 독특한 카메라 기법을 가진 영화를 보고 싶다면, 그리고 생각할 만한 꺼리를 가진 영화를 보고 싶다면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추천한다.
 |
| 땅에 쓰는 시 한 장면. |
영화 ‘땅에 쓰는 시’는 대한민국 1호 국토개발기술사(조경)를 획득한 최초의 여성이자 1세대 조경가인 정영선(83)의 그동안의 치열한 작업 정신과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에 담아낸 숭고한 기록이다. 집, 대형 건물과 같은 건축물이 아닌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조경에 포커스를 두고 지금까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들꽃들도 멋진 풍경이 될 수 있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땅에 쓰는 편지’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사람을 위로하려 노력하는 정다운 감독의 영화적 가치관과 한국의 자연경관을 기본으로 거기에 아름다움을 지향하며 자연과 삶, 현재와 미래를 잇는 작업을 계속 중인 조경가 정영선의 신념이 담긴, 오랜만에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영화이다.
 |
| 땅에 쓰는 시 한 장면. |
영화 ‘빅토리’는 레트로 음악과 춤 등 그 시대 추억의 볼거리부터 웃음과 감동, 그리고 영화 안에서 지역성이 갖는 의미까지 많은 것을 담아낸 매력적인 영화였다. 실제 1984년 거제고등학교에서 결성된 치어리딩팀‘새빛들’을 모티브 한 영화는 배경이 거제라는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어 대부분 거제에서 촬영됐으며 지역 사투리로 구현되는 언어들은 신선하면서 거제의 지역성을 살려내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김원준의‘Show’, 서태지의 ‘하여가’등 90년대 레트로 음악까지. 거제라는 작은 지역에서 치어리딩이라는 세련되고 도시적인 소재를 가지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가려는 여고생들의 고군분투는 응원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으로 작용했다. 누군가를 응원한다는 것이 정렬되고 정형화된 의미심장한 그 무엇이 아닌 춤으로도 승화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응원하고 지지한다는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가능하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영화는 청소년 성장기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연애 요소보다는 여고생들의 꿈을 위한 도전과 서로를 응원하며 연대하는 과정이 코믹하면서도 뭉클하다. 우리는 지금 응원이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것의 형태가 춤이든 노래든 언어이든. 이번 국회의사당 집회 때 국민들이 흔들었던 응원봉의 의미를 다시 한번 떠오르게 하는 영화. “응원한다! 내를 그리고 느그를” 현재 응원이 필요하다면 2024년이 지나기 전에 이 영화를 꼭 한번 보기 바란다.
 |
| 보통의 가족 한 장면. |
한국 멜로영화의 거장 허진호 감독의 신작으로 지금까지 보여줬던 그의 색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장르에 대한 도전을 선보였던 영화 ‘보통의 가족’. 거기에 설경구, 김희애, 장동건, 수현의 열연과 영화 속 캐릭터들의 감정선을 너무나도 잘 살린 음악까지. 영화는 “거장의 클래스를 증명한 웰메이드 가족극”이라는 수식어에 맞게 정교하고 치밀했다.
원작은 ‘더 디너’라는 네덜란드 소설로 네덜란드, 이탈리아, 미국에서 영화화됐으며 미국판은 리차드 기어가 주연으로 열연한 바 있다. 이번 허진호 감독의 작품은 네 번째 리메이크된 작품으로 다른 국가에서 만든 영화들도 찾아보고 비교해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를 줄 것 같다. ‘만약 내 자식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보는 관객이 부모라면 딜레마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영화, 연말에 맥주 한 캔 앞에 두고 혼자 조용히 관람해도 좋을 것 같다. 왜? 당신도 딜레마에 빠지게 될테니까.
이렇게 다섯 편의 영화를 선정하고 나니 의외로 내가 올해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많이 매료됐었음을 알게 됐다. 실은 나는 다큐멘터리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뭔가 연출이 가미된 영화가 아닐까하는 의심이 먼저 작용했던 나의 뇌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독립영화를 접하면서 이러한 생각들이 180도 바뀌었다. 누구를 또는 무엇을 몇 년을 걸쳐 지켜보고 완성해 낸 다큐멘터리 영화들의 숭고함은 하찮은 의심 따위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위에 언급한 영화들 이외에 다큐멘터리 영화로 진모영 감독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 올드 마린 보이(2017)도 올해 나에게 감동을 준 영화다. 그리고 올해 본 영화 중 ‘인디 봄’에서 소개하진 못했지만 전,란(2024), 리볼버(2024), 괴물(2023) 등도 연말에 조용히 방구석에서 보기 좋은 영화로 추천하고 싶다. “당신의‘올해 영화 Best 5’는 무엇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