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루가 길가에 놓여 있다. 힘에 부친 그 무언가를 짊어졌는지, 자루의 등뼈가 굽어 있다. 자루의 직립은 늘 위태롭다. 하루치의 낮과 밤을 눈코 뜰 새 없이 살아내도, 스스로의 등을 꼿꼿이 세우고 살기엔 버겁다. 팽팽히 조여 오는 어둠과 칼끝 겨누는 바람 앞에서 중심 잃지 않기 위해, 자루는 흐물거리는 뼈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생의 바닥을 무거운 몸으로 버티며 나아가는 자루의 저 안간힘. 병원에 입원한 그녀도 더 이상 뒷걸음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 끌어모아 아침을 깨우고 있다.

교통사고로 뇌손상을 입은 그녀는 내가 가르치는 문학회에서 시 공부를 하며 등단한 시인이다.

하루는 한 택시 기사에게 전화가 왔다.

“어떤 여인이 무작정 택시를 타고, 자기 집 앞으로 가자 했어요. 말한 그 지점까지 가서 내려줬는데요.”

“그런데요?”

“혹시, 실종 신고가 들어오면, 제 전화번호 알려 주세요. 제가 보기엔, 약간…”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나요?”

“네.”

“택시비는 불러준 계좌로 보내드릴게요.”

해 질 녘의 슬하에서 자라는 서쪽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서쪽 하늘은 쓸쓸한 노을을 담아 놓은 자루 같았다. 붉은 자루를 쏟아부으면, 그녀의 서러움이 함부로 발설하지 않았던 지난날들을 토해낼 것만 같았다. 저녁의 방향으로 번지는 노을은 슬픔처럼 어둑해져 갔다.

한번은 그녀가 이런 말을 했다.

“아직도 그 의사는 살아 있어요. 이름만 대도 알 만한 명사예요. 그 인간이 내가 뇌손상 후유증으로 입원했을 때, 나에게 몹쓸 짓을 했어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치가 떨려요. 복수할 수도 있었죠. 그놈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려 짓밟을 수도 있었어요. 충분한 증거가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래봤자, 뭐하겠어요. 오로지 기도할 뿐이지요. 그래도 간혹 한 번씩 이렇게 벌떡증 나서 힘들어요.”

커다란 입으로 무언가를 담기만 한 자루처럼 그녀도 아픔과 분노와 좌절을 담기만 했다. 토해내지도 못한 채, 그녀 가슴께에 얹힌 화(火)라는 덩어리가 독니를 드러내며 자신의 심장을 물어뜯어도 부르르 떨며 참아야 했다. 그녀는 그 일이 일어났던 계절만 되면 막다른 마음의 벼랑 끝에서 죄도 없이 몸을 던지며 슬퍼했다. 수없이 복수의 칼을 갈며 생각만으로도 번뜩이는 칼의 자세를 만들었지만 한 움큼의 바람도 베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문학을 만나면서부터 칼끝에서 시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벼리고 벼린 칼에서 쇳소리 대신 꽃향기 풍겼고, 문학상도 여러 개 수상했다.

가까이 가서 자루를 보니 깨진 유리조각이 들어있는지 울퉁불퉁하다. 자루의 저 몸에는 얼마나 많은 아픔들이 들어 있기에, 분노라는 과장된 몸짓의 유리조각이 저리 날을 세우고 있는 것일까. 목까지 차오른 유리의 무게를 자루는 헉헉대며 이겨내듯, 병원에 입원한 그녀도 아픔을 잘 이겨냈으면 좋겠다.

어스름이 담긴 자루, 그 저녁이 캄캄한 엉덩이를 지상에 내려놓고 있다. 발길에 차여 허름해진 어둠이 자루 속에서 몸을 푼다. 오늘밤도 자루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유리조각과 아픔과 어둠을 끌어안는 힘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며 버티고 있다.